[워싱턴에서]미국 대북정책은 한국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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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23일 커트 캠벨 미 국방부 부차관보가 동아시아.태평양 전략 보고서를 설명하는 외신 브리핑을 했을 때 그가 스쳐가듯이 한 발언에 주목한 이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북한의 핵의혹 지하시설에 대해 미국도 제한된 자료를 갖고 있을 뿐이며 의혹은 반드시 해소돼야 하되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긴급한 문제는 아니다" 라고 했다.

이 발언을 중시하는 까닭은 브리핑 직전 국무부에서 윌리엄 페리 신임 대북정책 조정관을 비롯해 관련 부처들 간에 북한관련 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캠벨 부차관보와 주변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미 정부는 카트먼 특사의 발언으로 한국에서 촉발된 '한.미간 견해차' 논란이 대북정책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는 것이다.

미 정부로서도 민감한 대북정보가 부처간 갈등 와중에 밖으로 새고 담당자들 사이의 알력이 대북정책에 혼선을 빚고 있음에 긴장하고 있다.

대북정책 방향을 재설정하는 데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할 미 정부는 적어도 두가지 점에 각별히 주목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북한의 지속된 도발과 국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金大中)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 기조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과 미국내 보수인사들 조차 한국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둘째, 여러 시나리오에 기초해 대북전략을 강구할 미국은 장기적으로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의 '위험스런 동침 (同寢)' 까지를 염두에 둔 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후자에 관해 한국이 개입할 여지는 많지 않지만 우리의 대북정책이 미 조야 (朝野)에서 무시당하지 않는 분위기를 유지하는 일은 결국 우리 몫이다.

서해안 침투 북한선박을 놓치는 안보상의 허점이나 금강산 관광선에 정부 고위 인사들을 태우려는 '조급한' 발상 등은 모두 미국의 대북정책 논의에 우리의 입지를 축내는 일들이다.

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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