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경제포럼]외환보유고 적정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지난 달 28일 국회 재경위의 한국은행 국정감사에서 국민회의 김근태의원과 한나라당 김재천의원은 제2의 금융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각각 8백50억달러.7백50억달러으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경부.한은은 "일정 수준까지 확충할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얼마가 적정하다고 못박는 것은 자칫 외환시장의 동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곤란하다" 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재경부 및 민간연구소.학계 일각에서 외환보유고를 무작정 쌓을 것이 아니라 외채부터 갚고 보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지원자금중 다음달에 만기가 도래하는 28억달러의 상환여부를 앞두고 외환보유고 논란은 고조될 전망이다.

[도움말 주신분]

▶서강대 김광두 교수 ▶자딘 플레밍 스티븐 마빈 이사 ▶시티은행 박진회 자금담당이사▶대외경제정책연구원 왕윤종 세계경제실장▶금융연구원 이장영 연구위원▶한국개발연구원 조동철 연구위원▶한국은행 국제부 조성종 부부장▶클레멘테 캐피털 (뉴욕) 조영제 부사장▶대우경제연구소 한상춘 국제경제팀장▶재정경제부 허용석 외화자금과장 (가나다순)

◇ '적정수준' 의 외환보유고란 존재하는 것인가.

사실 외환보유고를 무한정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비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국채를 발행, 외환보유고를 늘릴 경우 조달금리는 10% 정도다.

이 돈을 금리 5% 남짓 하는 미국 국채에 묻어 둔다면 4~5%의 순비용이 발생, 1백억달러면 4억달러 (5천억원) 의 추가비용을 물어야 한다.

이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도 있다.

국내에 들어온 달러가 원화로 환전돼 투자나 소비로 흘러갈 채널을 차단하는 셈이니 결과적으로 내수를 위축시키게 된다.

그래서 '적정' 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대개 '3개월치 수입금액' 을 기준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지난 7~9월의 수입누계는 2백15억달러였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3개월치 수입금액의 209%로 싱가포르.태국보다 낮고 홍콩.말레이시아보다는 높은 편이다.

지난해 외환위기는 외국 채권금융기관들이 급격히 자금을 회수한데서 시작된 만큼 단기에 유출될 가능성이 큰 포트폴리오투자 (주식+채권) 와 단기외채의 합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지난 8월말 현재 IMF기준 총대외지불부담 1천5백36억달러중 단기외채는 3백20억달러였다.

따라서 이 금액에 주식투자자금 2백억달러를 합하면 5백20억달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외화자금 유출이 극심했던 지난해 8~11월중 빠져나갔던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은 불과 15억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전액유출' 을 가정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또 대우경제연구소는 (수입금액 3개월분+3개월내 만기도래 외채원리금) 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금년말과 내년말 적정외환보유고로 각각 3백82억달러.4백98억달러를 제시했다.

◇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위기는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지난 9월 이후 미국의 세차례 금리인하로 국제금융시장이 평온을 되찾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불황 그에 따른 신용경색 위험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둘째 국내 금융시스템이 표면적으로 안정된 것 같지만 투신 문제등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가 존재하고 5대재벌의 구조조정도 지지부진하고 있다.

연간 수출 1천3백억달러의 10%에 해당하는 1백30억달러를 외채이자로 지불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위기는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마지막으로 위기는 일단 발생하면 외환보유로 인한 기회비용과 비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사실을 지난해 뼈저리게 경험했다.

더욱이 내년도 외환수급을 추정해보면 결코 여유만만할 때가 아니다.

혹 국내외 돌발변수가 발생하더라도 안심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을 쌓아둬야 한다는 것이다.

◇ 최소한의 수준만 유지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외환보유고는 앞서 지적한대로 공짜가 아니다.

확률이 지극히 낮은 위기상황까지 대비할 이유는 없다.

연말 예상치 4백71억달러면 위기수습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은 확고했다고 본다.

최근 발생한 남미 위기나 엔화 급등락 등 외부충격에도 불구하고 원화가 흔들리지 않은 것을 예로 들면서 한국은 안정권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이다.

둘째 외환보유고가 외국인으로 하여금 투자를 회수하거나 신규 투자를 망서리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셋째 외환수급에 불균형이 발생하면 환율이 변동, 완충 역할을 할 것이다.

변동환율제를 택한 주된 이유는 외환보유고를 덜 쌓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외환보유고 수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늘리느냐가 더 중요하다.

장사해서 번 돈 (무역흑자) 으로 쌓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지금처럼 해외에서 빌린 돈으로 쌓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신용등급이 올라가면 외국인투자가 촉진될 뿐만 아니라 조달금리가 하락해 일거양득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첫째 신용평가기관의 과거 행태를 보면 신용등급 하향조정에는 신속하지만 상향조정에는 대단히 신중하다.

'확실한 개선' 을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등급 조정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신용평가기관으로서는 '장사를 그만 둘' 생각이 아니라면 연거푸 두번 실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외환보유고 수준이 신용평가의 핵심인 '외채상환능력' 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으나 안정성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쌓여 있는' 외환보유고 자체보다 달러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될 것인가 하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 만기도래하는 IMF 자금을 갚아야 하나.

원래 약속대로라면 12월중 28억달러, 내년 1.2월 각각 10억달러씩 갚아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최근 IMF와의 협상에서 상환여부는 한국 정부가 결정하도록 합의보았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상환을 미루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약속대로 갚자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예정대로 갚자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첫째 어차피 빌려서 갚아야 하는 형편이라면 비용을 따져보고 싸게 먹히는 쪽을 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IMF 자금을 연장할 경우 부과되는 벌칙성금리가 외평채 유통금리와 맞먹는 9% 이상에서 결정된다면 이는 자칫 기발행물량은 물론 앞으로 발행될 모든 한국물 금리를 자동적으로 올리는 요인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루지 말고 갚자는 둘째 이유는 다소 정치적.심리적인 것이다.

대내.대외적으로 장래에 대한 정부의 자신감을 천명하는 수단으로 삼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제는 외환수급상황을 빤히 들여다 보고 있는 외국인들이 '빚으로 빚을 갚는' 것에 크게 감격할 리 없다고 회의를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갚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신뢰 쌓기' 에 더 유리할 거라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IMF도 표면적으론 한국정부에 옵션을 줬지만 내심으론 갚기를 바란다는 소문이다.

◇ 종합결론

최저수준의 외환보유고를 확보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국내외 돌발적인 상황에 대비, 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

도 더 쌓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다만 지금부터는 외환보유고 수준보다 어떻게 쌓느냐 또는 어떻게 하면 달러가 계속 흘러 들어올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느냐가 더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다.

예를들면 기업구조조정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신속히 진척될 것인가 하는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을 좋은 투자대상으로 생각하면서도 망서리는 외국인들은 개별기업 단위에서 실질적인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버틸 수 없는 기업이 문을 닫거나 경영권을 포기하고, 경영혁신이 일어나는 등 근본적인 변화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또 한보.기아와 같은 극한 상황이 재발할 경우 정부가 '예상하고 있었다' 는 듯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원칙에 맞고 일관성 있는 수습방안을 제시,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권성철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