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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 칼럼]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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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앙일보 북한문화유산조사단이 돌아왔다는 기사가 나가는 날 저녁이면 어김없이 내 사촌여동생은 전화를 걸어 왔다.

"오빠 잘 다녀왔어요?" 평범한 안부전화지만 이 한마디 속에 그녀의 48년 한 (恨) 이 짙게 담겨 있음을 나는 안다.

사촌 여동생의 부모, 나의 숙부모는 전쟁이 끝날 무렵 어떤 연유에서인지 하나밖에 없는 딸을 버려 둔 채 월북했다.

천애 고아가 된 여동생은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어렵고도 고달픈 성장기를 거쳐 지금은 화목한 가정을 이뤄 살고 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숙원 (宿願) 은 북으로 간 부모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이다.

오라비가 북한을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도 생사마저 확인하지 못했느냐는 말 없는 힐책이 여동생 전화 속에 담겨 있음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었다.

지난 여름 8월 29일. 홍석현 (洪錫炫) 사장을 수행해 네번째 방북한 일정의 마지막 날, 북한 문화.언론인들과의 만찬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아태위원회 참사가 귀엣말을 전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아!올 것이 왔다. '

그때 솔직한 내 심정은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가족사의 한을 푸는구나 하는 감회와 북한 친인척을 만난 다음 생겨날 골치 아플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뒤탈은 없을까?

권위주의정권 아래 살아 온 연약한 지식인의 더듬이가 잽싸게 발동했다.

함께 방북한 이영종기자의 동행을 북측에 요구했다.

선선히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고려호텔 1층 식당에서 냉면 한 그릇씩을 시켜 놓고 생면부지 사촌동생과의 대화가 이뤄졌다.

삼촌내외분은 이미 지난 70~80년대 돌아가셨지만 두고 온 딸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으며 전후에 태어난 세 남매가 장성해 자신은 평성이과대학 자동화부 (컴퓨터) 교수, 남동생은 평성사범대학 교수이고 누이는 결혼했다고 전했다.

삼촌내외분의 기일 (忌日) 을 받아 적고 1시간여 대화를 나눈 다음 사촌동생과 헤어질 때 나는 생각했다.

왜 우리는 이렇게 헤어져 생사조차 모른 채 서로 으르릉대며 살아야 하는 가.

나야 운 좋게 북한을 드나들며 가족사의 한을 풀었다지만 더 기막히고 애절한 한을 담은 이산가족의 상봉은 무슨 수로 이뤄질 것인가.

어제 금강산관광 첫 배가 장전항에 도착했다.

이 배에 동승한 실향민 장희복씨의 남다른 설렘이 내 가슴을 친다.

금강산 밑자락 온정리에서 자란 장씨는 '막내동생이 살아 있다면 예순살일 텐데 이번에 만나 볼 수 있을지…' 하는 애타는 기대로 첫 배를 탔다고 한다 (중앙일보 11월 18일자 23면 기사) .이런 바람이 어디 장씨뿐이겠는가.

수백만 실향민 가족중 남쪽에서 올라간 우리 삼촌 같은 집안이 또 얼마겠는가.

내가 금강산을 두번 다녀왔다고 하면 모두가 묻는다.

그렇게 빼어난 산인가, 설악산과 비교하면 어때?

이때 나는 금강산은 금강산일 뿐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금강산은 그만큼 빼어난 산이지만 실향민 입장에서 금강산행은 그냥 유람일 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식 (食) 보다 더 급한 내 자식, 내 부모를 북한땅 어딘가에 버려 둔 채 유유자적 유람할 마음이 생겨날 것인가.

금강산관광이 분단 50년을 허무는 화해와 교류의 첫 뱃길이 돼야 한다고 남과 북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러나 산천경개 유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화해와 교류를 촉진하는 민족사적 의미를 지니려면 현행 관광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인적 교류가 없는 북한관광이란 큰 의미가 없다.

지난주 통일부 정세현 (丁世鉉) 차관이 한 세미나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지금 당장은 현실성이 없지만 금강산지역을 관광특구로 만들어 이산가족면회소를 설치한다는 개인적 희망을 폈다.

나는 丁차관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금강산 관광사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도 면회소는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같은 경제난에 비싼 비용을 들여 금강산 유람길에 오를 실향민이 몇이나 있겠는가.

날씨탓, 비용탓만이 아니다.

가족의 한을 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기 때문에 실향민들이 외면하는 것이다.

둘째, 이산가족을 버려 둔 채 어떤 형태의 남북간 화합이나 교류도 빛을 발할 수 없다.

첫 술에 배 부르겠는가.

이제 첫 배가 떴으니 남북한 당국자들이 만나 이 기회에 금강산에 이산가족면회소를 설치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보다 급하고, 이보다 화해적이며, 이보다 교류적인 어떤 획기적 화해정책도 있을 수 없다.

내 여동생, 내 가족, 내 부모의 분단 한풀이가 없고는 진정한 남북화해란 허위일 뿐이다.

권영빈(논설위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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