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클린턴과 마하티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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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sia -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의 이름에는 형용사만 네 개 있고 명사는 하나도 없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명사 노릇을 해야 할 '협력체' 란 말에 너무 구체성이 없다는 지적인 바, 조직체로서 APEC의 취약한 구속력과 실효성을 조롱하는 말이기도 하다.

빌 클린턴이 취임한 1993년 미국 시애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그의 제안으로 연례회의를 열게 됐으니 클린턴의 주도적 역할이 큰 조직이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시애틀 모임에 불참하고 별도의 아시아협력체 구성을 제안했으나 결국 APEC에 합류, 이번엔 주최국 노릇까지 맡고 있다.

문화배경도다르고 산업화 수준도 다른 20여개국이 모여 실속있는 의논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슈퍼파워 미국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바가 큰 조직인지라 클린턴의 불참만으로 회의 성과에 대한 기대가 뚝 떨어질 정도다.

보스가 손수 나타나 어깨를 다독거려줘야 안심이 되지, 고어 부통령이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닌 모양이다.

클린턴의 불참은 출발예정 당일에 발표됐다.

이라크사태 때문이었는데, 나중에 사태가 완화되는 바람에 APEC 참석에 이어붙여 놓았던 일본과 한국 방문은 예정대로 할 전망이다.

결과적으로 미운 놈 집만 빼놓고 다니는 셈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것은 클린턴과 마하티르 사이에 감정의 골이 워낙 깊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각료회담에참석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투옥된 전부총리 안와르의 부인을 호텔로 불러 만나본 것도 이 갈등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라피다 말레이시아 무역장관의 항의 방법이 재미있다.

그가 기자들 앞에서 다음번 미국가는 길에 켄 스타 (클린턴의 비행을 조사해 온 특별검사) 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올브라이트는 "그는 감옥에 있지 않은데요" 하고 쏘았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라피다가 대꾸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 사람 얘기를 듣고 싶어요. " 안와르의 주된 죄목중 하나가 동성애란 사실도 마하티르가 내세우는 '아시아적 가치' 를 상징해준다.

동성애를 범죄로 다룬다는 사실 자체에 서양인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그런데 이것이 말레이시아에서는 정치지도자의 인격파탄을 증명하는 무기로 쓰이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가치' 를 내세워 안와르를 응원하는 올브라이트와 클린턴의 불륜을 꼬집어 응수하는 라피다의 가치관은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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