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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벌, 너는 내 운명 … 연 3억원 봉 잡은 ‘꿀 아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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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원 청토청꿀 농장의 김대립 대표가 벌통을 들어올리자 벌들이 날아오르며 왱왱거렸다. 은근히 겁이 많은 기자가 물었다. “쏘지 않을까요?” 김 대표의 답. “날갯짓 소리를 들어보니 얘들 오늘 기분 좋네요. 쏠일 없어요.” 그 말 그대로였다. 촬영하는 한 시간 동안 사진기자의 옷 속까지 파고든 벌들이 있었지만 한 방도 쏘지 않았다. [청원=김상선 기자]

“대학에 가지 않고 벌을 치고 싶어요.”

충북 산골의 양봉 농장 집 아들이던 고교생은 1992년 어느 날 큰맘 먹고 먹고 아버지한테 이렇게 털어놨다. 아버지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벌을 쳐 온 집안.

“공부를 한다면 뭐든지 뒷바리지해 줄게. 일단 대학 가서 생각해 보자.”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를 아들은 차마 거스르지 못했다. ‘싫어요’의 ‘싫’자가 목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아들은 벌 농장 바로 옆의 시골집을 떠나 읍내에 자취방을 얻었다. 방과 후에 입시학원에 다니기 위해서였다. 일단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머릿속에선 벌이 계속 왱왱거렸다. 고교 학생주임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내 학교 옥상에서 벌 다섯 통을 키우며 관찰했다. 충청전문대(전자공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대학 뒷산에서 벌을 치는 게 취미였다. 졸업 후 아들은 다시 아버지 앞에 꿇어앉았다. “그럼 이제 벌을 치겠습니다.” 이번엔 아버지도 반대할 수 없었다. “공부를 했으니 됐다. 하고 싶은 걸 해.”

그로부터 10년 뒤, 아들은 벌 1000통을 키우는 대규모 토종벌 농장의 운영주가 돼 있다. 충북 청원 청토청꿀(www.ctcg.co.kr) 농장의 김대립(35) 대표다. 120통에서 시작해 8배 넘게 키운 것. 일손을 획기적으로 덜어주는 신기술을 개발한 것이 사업을 키우는 원동력이 됐다. 토종벌에 관한 특허가 4건, 실용신안이 3건에 이른다.

그의 e-메일 아이디(ID)는 ‘beespapa’, 그러니까 ‘벌 아빠’다. 벌 농장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벌에 빠졌다. “게임에 빠져서 PC방에서 날 새는 아이들 많잖아요. 저도 벌과 씨름하면서 밤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비실비실한’ 벌통을 공부 재료 삼아 아버지한테서 받아 키우며 관찰했다. “벌 치는 이들은 벌통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요. 꿀이 찰 때까지 가만히 두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어차피 안 될 벌통을 받은 덕분에 벌집을 쪼개어 벌의 습성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 신기해서 열심히 들여다본 것인데, 그런 것들이 이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밑거름이 되더군요.”

벌 치는 일에 뛰어들어 처음 도전한 것이 ‘인공 봉분’이었다. 벌 농사의 핵심 중 하나가 봉분, 즉 무리 나누기다. 해마다 5~6월이면 벌통 속에 마릿수가 늘어나고, 새로운 여왕벌이 탄생하면서 벌떼 일부가 벌통을 빠져나와 새 무리를 이룬다. 언제 이렇게 ‘자연 봉분’을 할지 알기 힘들다. 그래서 5~6월이 되면 벌통을 지키고 있다가, 무리 나누기를 하려고 집단 비행을 시작할 때 쫓아가 새 벌통으로 유인해야 한다. 벌통마다 일일이 그렇게 해야 하니 여간 손이 가는 게 아니다. 벌 농장을 키우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어려서 관찰한 벌의 습성을 떠올리며 인공 봉분을 하려고 온갖 시도를 해 봤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3년 만에야 방법을 찾아냈다. 2003년 특허까지 받은 이 기술을 동원하면 5분이면 봉분이 끝난다고 한다. 일손을 확 덜게 돼 혼자 벌을 치면서도 농장 규모를 1000통까지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양봉협회에 따르면 토종벌 농장 규모는 대개 100통 이하다.

봉분 시기를 조절하는 것도 가능했다. 봄 꽃이 만발하기 직전에 인공 봉분을 했다. 다른 농장의 벌들은 꽃이 활짝 핀 5~6월에 무리 나누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가 치는 벌들은 이미 봉분을 마치고 열심히 꿀을 땄다. 생산성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서양벌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한 특수 구조의 벌통이나 켜켜이 색이 다른 ‘무지개 꿀’도 김 대표의 아이디어다. 일반 토종꿀은 1.2㎏ 한 통에 12만원 정도인데, 무지개꿀은 50%가량 비싼 18만원을 받는다. 한때 백화점·대형마트에 납품했으나 이젠 소비자 직거래만 한다. 맛본 고객이나 입소문을 전해들은 이들의 주문 수요만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매출은 연 3억원 안팎. 순익이 얼마인지 정확히 따져본 적은 없단다.

김 대표는 인공봉분 기술 보급에도 열심이다. 지방 농업기술센터에서 강의하고, 농장을 찾은 이들에게 1박2일 실습비로 1만원만 받고 기술을 전수한다. 특허까지 낸 독보적 기술을 왜 남들한테 거저 주는지 궁금했다. “요즘 토종꿀이라는 것 중에는 토종벌에 설탕물을 먹여 만든 것이 많아요. 꽃에서 나온 진정한 토종꿀 업계가 커져야 제 사업도 더 잘되겠다는 생각에 기술을 열심히 전파하고 있어요.” 다만 뭔가 한 가지는 숨겨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무지개꿀 제조 방법은 비밀이란다. 올해도 다음 달 12~20일에 그의 농장에선 ‘토종꿀 축제’가 열린다. 일반인들이 꿀 따기, 밀랍 만들기 같은 체험을 할 기회를 마련했다. 제대로 된 토종꿀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강연도 할 생각이다.

김 대표는 미혼이다. 혼인을 해 생긴 자녀가 벌꾼의 대를 잇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벌 치기 싫다고 해도 이 길로 가라고 강권할 것 같아요. 애써 개발한 기술과 노하우를 제대로 이어가게 하고 싶어요.”

김대립 대표가 개발한 기술

◆서양벌 침입 방지 벌통=입구를 꼬불꼬불한 미로형으로 만들었다. 늘 드나드는 토종벌은 잘 찾아다니지만, 서양벌은 헤맨다. 덕분에 7~8월이면 서양벌의 습격을 받아 토종벌이 죽는 일이 확 줄었다. “사실 벌통 입구에 풀만 우거지게 해도 서양벌이 잘 침입하지 못한다”는 게 김 대표의 귀띔.

◆무지개 꿀=시루에 찐 ‘무지개떡’처럼 층층이 색이 다른 꿀. 원래 벌집에 든 꿀은 이렇다. 시기마다 피는 꽃이 달라 벌들이 따오는 꿀도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벌집이 갈색이라 제각각인 꿀 색깔이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는 벌들이 우윳빛 벌집을 만들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내 층마다 다른 색이 살아나는 무지개 꿀을 만들었다.

◆자동 여닫이 벌집=기온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벌이 드나드는 벌통 입구가 자동으로 닫힌다. 겨울에 찬바람이 들어가 벌이 죽는 일을 막는 장치다. 일반 농가에서 통풍·환기를 생각해 벌집 입구를 겨울에도 틔워놓기 때문에 온도가 뚝 떨어질 때 벌떼가 죽는 일이 종종 생긴다.


청원=권혁주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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