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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이 경쟁력이다] 금산 벤처농업대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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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 벤처농업대학 학생들이 지난달 31일 충남 금산 농업기술센터에서 수업이 끝난 후‘한국농업 이렇게 하면 망한다’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금산=조문규 기자]

'정부 지원과 보조금만 기다려라' '잘만 재배하면 팔린다고 착각해라'.

지난달 31일 충남 금산군 농업기술센터 2층 회의실. 토요일인데도 자정 가까이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이날은 한국벤처농업대학(학장 김동태 전 농림부장관) 수업이 있는 날이다.

오후 3시에 시작한 수업이 끝난 뒤 20~60대 다양한 연령층의 농민들이 10여명씩 조를 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주제는 '한국 농업(농민)이 망하는 길'. 자신의 농사 실패담을 들려주며 '망하는 지름길'이 뭔가를 집중 조명했다. 이날 토론은 농촌도 변해야 사는데 무엇부터 버려야 할 지를 알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뤄졌다.

'농업의 벤처산업화'를 기치로 문을 연 벤처농업대학이 우리 농업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현장이다.

◇벤처농업의 메카로="이 곳은 농사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무작정 농사짓는 시대는 갔다. 농민들도 경영과 마케팅에 눈을 떠야 한다."

이 대학의 실질적 운영자인 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43)박사는 2000년 '벤처농업'이란 생소한 이름을 들고 전국을 돌며 농민들에게 강연했다. 농민들의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그는 이듬해 1년짜리 교육과정의 상설 교육기관을 만들자는 주위의 권유로 벤처대학을 세웠다. 다행히 김행기 금산군수가 금강변에 있는 한 폐교를 학교 건물로 쓰라며 내놓았다. 이곳에서 2년간 대학을 운영하다 지난해 지금의 농업기술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입학경쟁도 치열하다. 올해 뽑은 4기 학생 100명은 3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왔다. 이미 성공한 농민에서부터 농림부 과장, 대학원생, 귀농 도시민 등 전국에서 다양한 사람이 모였다. 1.2.3기 등록생 279명 중 절반 이하인 128명만이 졸업했다. "다양한 농사 체험을 한 동료 농민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값지다"며 일부러 졸업하지 않는 농민도 있다.

◇'스타 농민'을 키운다=나물로만 여겨졌던 도라지를 약재로 개발한 진주 장생도라지 이영춘씨, 매실 가공식품의 폭발적 인기를 주도한 광양 청매실농원 홍쌍리씨 등도 이 대학을 졸업했다.

국내 최초로 금쌀을 만들어 중국 수출을 눈앞에 둔 부산 풍년농산 나준순씨는 "어디서 쌀이 나왔느냐보다 어떻게 처리.보관했는가가 밥맛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나씨는 쌀 수입개방 문제로 떠들썩할 때 오히려 쌀 수출을 생각한 농민이다.

민속주 생산업체인 논산 가야곡왕주 이준연 실장은 3년 전 이 대학에서 들었던 '생각하지 말고 상상하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조만간 유흥업소를 점령하고 있는 양주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최근 산삼배양액으로 만든 산삼주의 맛을 현대적 감각으로 바꿨고, 도수도 40도로 높였다. 치밀한 마케팅 전략도 짜놓았지만 벤처농대 졸업생들 후원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네트워크가 경쟁력이다=2기 졸업생인 금산 청풍인삼의 김길용 사장은 홍삼을 잘게 자른 절편삼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올해 초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동기생과 우연히 전화 통화하다 버섯을 절편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를 얻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김 사장은 "이 대학을 다닌 뒤 주먹구구식 동네 장사꾼에서 진취적 사업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면서 "졸업 후에도 유지되는 동기생 및 강사들과의 모임이 새로운 아이디어의 보고"라고 말했다.

올해 4기에 농림부 식품산업과 최대휴 과장, 장수군 농림과 김기중씨 등 공무원 여러 명이 입교했다.

농민들 얘기를 듣고 지속적인 농정 모니터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서다.

금산=조한필 기자<chopi@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학교 운영 어떻게하나]

벤처농업대학은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다. 숙식비.교재비를 포함한 수업료는 모두 자부담이다. 공짜로 등 떼밀려 참석하는 교육으로는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의와 운영에 도움을 주는 각계각층 전문가들도 모두 무보수 자원봉사다.

입학생 선발기준은 우선 창의력과 기업가 정신이 있어야 한다. 명함과 e-메일이 없는 사람은 아예 입학자격이 없다. 졸업논문은 '사업계획서'로 평가한다. 얼마나 톡톡 튀는 사업아이템과 실행계획을 내느냐가 심사기준이다.

수업은 매월 한번 1박2일 일정으로 하루 5~6시간 계속된다. 수업 내용은 포장 디자인.고객 관리.특허.전자상거래 등으로 이뤄져 있다. 벤처농대는 새로운 마케팅 기회를 계속 만들어 나간다. 교육이 교육으로 끝나지 않고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매년 세미나.전시회.이벤트를 열며 스스로를 알린다.

농업에 기술과 문화예술을 접목한 전시회가 좋은 예다.

[농산품이 예술을 만났을 때] 질그릇 속 인삼초콜릿 등 졸업생 이색 전시회 열어

지난 5월 서울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벤처농업대학이 주최한 '웰빙 농산물 컬렉션'이 열렸다. 먹거리와 예술의 만남을 주제로 한 이 컬렉션엔 이 대학 출신 벤처농업인 13명이 생산한 농산물에 작가들의 미적 감각이 가미된 작품이 선보였다.

벤처농대는 2002년 2월 '벤처농업과 문화벤처의 만남전'이란 이색 전시회를 처음 열었다. 작가들은 "농민들과 무슨 작품전이냐"며 참여를 꺼렸으나 민승규 박사의 설득으로 도예.목공예.섬유 작가 등 30여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그해 겨울 '견우와 직녀의 크리스마스전'을 열었다. 달 표면 같이 울퉁불퉁한 상황버섯 위에 우주인 형상의 장난감을 올려놓은 '혹성탐사', 질그릇 항아리에 담긴 인삼 초콜릿 등. 벤처농대는 크리스마스를 '우리 농산품을 주고받는 날'로 정착시키려 한다.

벤처농민과 벤처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작업은 계속될 예정이다. 이제 농업이 단순히 '먹는(eat)'산업에서 '즐길거리(entertainment)'가 결합된 '먹고 즐기는(eaterrainment)'산업으로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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