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고은의 북한탐험]12.개성 송악산 만월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개성 시내로 접어드는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번개 치듯 태극기를 보았다.

휴전선 대성동의 태극기였다.

가슴 속 박동이 커졌다.

하나의 사실이기보다 하나의 영감이었다.

그동안 나는 너무 익숙한 나머지 태극기에 대한 관심은 심심한 것이었다.

그런 태극기를 북한땅에서 보게 되는 그 감동은 새삼스러웠다.

내가 열두살이던 1945년 여름 종이에 서투르게 그려낸 그 이래 함께 살아온 국기였다.

1948년 김구 일행이 평양 모란봉극장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을 때도 72세의 김구와 36세의 김일성이 대좌한 벽면 중간에 쌍으로 질러진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분단 이전부터 하나의 민족과 나라를 절절하게 표상해온 것이었다.

그런 태극기가 영욕의 세월을 보내는 중에 휴전선 이남의 최북단 높은 게양대 위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갠 하늘의 푸름 속에서 그 흰 바탕의 만물 시원도 (始源圖) 인 태극기는 절묘했다.

그런 태극기에 맞선 이쪽에서는 같은 높이로 원색의 인공기가 진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민족은 하나인데 서로 다른 체제의 불화 (不和) 는 도저히 하나일 수 없다.

이제 이러한 현실을 비극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진부해졌다.

다만 1백년 전에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1백년 뒤에 그렇지 않으리라는 확신 앞에서 분단은 한 시기의 시련일 따름이다.

나는 개성시내 진입로로 얼른 향하지 않고 바로 판문점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지척이었다.

하지만 이미 개성의 진산 (鎭山) 송악산이 정면에 나타났다.

바위투성이였다.

송악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았다.

옛 스님 도선 (道詵) 이 이곳에 도읍을 정할 때는 반드시 소나무를 많이 심으라고 했거니와 송악이라는 이름이나 송도라는 이름이 다 환경의 당위를 일컫고 있는 것 같았다.

산의 얼굴을 대하자마자 그 동안의 풍상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실감케 했다.

개성.금천.개풍 일대의 산세는 서울의 북한.도봉.수락의 그것을 빼다 박은 형세였다.

그래서 이성계가 송악산을 떠나고자 해도 송악산과 생판 다른 곳을 택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런데 송악산은 북한산처럼 수려한 것은 아니다.

다만 삼엄한 기개를 깊이 파묻어 둔 무혼 (武魂) 이 서려 있어 그것이 한층 더 생명적이었다.

나는 무턱대고 만월대에 앞장서 올라가니 숨이 찼다.

그 곳 맨 위쪽 궁궐터를 지나서 산의 가파른 비탈에서 멈췄다.

그때였다.

아득히 서울의 북한산 원경을 시야 안에 쏜살같이 받아들였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산이 달려와 내 눈에 박히는 것이었다.

"북한산이다!" 라고 외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어쩌면 백두산.금강산.묘향산을 오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여기 와 남쪽 북한산을 보기 위해 내가 온 것인지 모른다는 역설에 눈물겨웠다.

38선 혹은 휴전선은 많은 사람들을 이동시켰고 서로 헤어지고 흩어지게 만들었다.

목숨 건 선택이기도 하고 그냥 맹목의 도망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연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휴전선 이쪽 저쪽의 주민은 그 곳에서 태어난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는 한국국민이고 하나는 '조선인민' 인 것이다.

개성은 본디 38선 이남의 한국이었다.

전쟁 뒤 획정한 휴전선에 의해 그 곳은 북한이 된 것이다.

마치 민들레 씨앗이 공중을 떠다니다 휴전선 이북에 내려앉으면 그 곳 민들레꽃으로 태어나고 이남에 내려앉으면 한국의 민들레꽃으로 태어나야 하는 것처럼 그것은 숙명일지언정 인간의지의 이념적 선택이 아니었다.

이 무슨 '장난' 이란 말인가.

그러나 만월대는 이런 생각조차 잠재울 만큼 허망과 무상 (無常) 의 현장이었다.

나를 보아라! 너무나 오랫동안 폐허인 나를 보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기 898년 후삼국 태봉의 궁예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그 태봉을 손에 쥔 왕건이 신라를 복속시킨 뒤 고려의 국도로 정한 것이다.

송도의 규모는 최초의 민족국가 수도로서는 작은 편이며 궁궐의 규모 역시 동서 4백45m, 남북 1백50m 정도의 계단식 대지 (垈地) 다.

정전 (正殿) 인 회경전 (會慶殿) 부근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는 풍류로 만월대라는 슬픈 이름을 얻은 것일까. 회경전과 함께 건덕전.원덕전들도 터만 남아 있고 조선 태조가 즉위했던 수창궁도 터만 짐작하게 된다.

1361년 북방 홍건적 10만의 병사가 난입함으로써 궁궐은 물론 내성.외성 안의 도읍 전체가 불타버린 잿더미로 되고 말았다.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려 6백37년 동안이나 오랜 폐허 그대로였다.

고려 멸망 30년 전에 도읍다운 도읍의 구실을 할 수 없었다.

피난한 왕이 돌아왔으나 임시거처에서 잇따른 외환에 안절부절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의 한양 천도로 텅 빈 터만 남아 비바람의 노천으로 돌아갔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 (匹馬) 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는 길재의 비탄이다.

흥망이 유수 (有數) 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오백년 왕업이 목적 (牧笛)에 부쳐시니/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더라. 이는 이성계의 간청을 거절한 고려 유신 원천석의 비탄이다.

6.25전 38선 이남에 미군이 주둔했을 때도 이곳 개성 만월대에 부대 막사를 짓다가 주춧돌 몇 개가 손상됐다 한다.

세월이 흘러가며 폐허는 더욱 폐허가 되어간 것이다.

이러한 만월대는, 역사라는 것이 남겨지는 것보다 사라지는 것이 훨씬 많다는 처절한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고 나는 만월대의 폐허야말로 역사의 본성 (本性) 이 아닐까 생각했다.

고려는 상고시대의 여러 나라들과 고대의 나라들을 지나 한민족이 처음으로 이뤄낸 민족국가다.

오늘날 세계에 알려진 대로 '코리아' 라는 이름이 바로 고려인 것도 그런 민족국가의 긍지가 되고 있다.

개성 방문에서 내가 들은 바로는 생전의 김일성은 이곳의 현지지도를 통해 만월대 폐허를 그대로 두지 말고 옛 궁궐 건물들을 다시 세우라는 '교시' 를 했다 한다.

고려 태조의 왕업에 민족적 의의를 부여한 것이다.

그래서 왕건릉 단장도 알뜰살뜰히 했고 그 곳의 우람한 비석 비문도 그의 분방한 초서로 새겨넣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북한 사정은 그 왕궁의 재건사업을 할 처지가 아닌 듯하다.

이왕이면 통일 뒤에나 남북이 하나 되어 그 고려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기를 나는 가만히 빌었다.

글 = 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