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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결단]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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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결단 3

전중윤 회장(가운데)이 대관령목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보험회사 사장까지 하던 전 회장이 일본에서 라면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고 공장 근처에 방을 얻어 견습공으로 일하던 것까지 다 이야기하자면 기가 막힐 것이다. 더구나 면(麵)의 원조는 중국이지만 라면으로 개발한 것은 일본이기 때문에 라면 생산 시설도 시설이지만 라면을 만드는 기술을 들여온다는 것은 정말 군사비밀 얻어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또 묘조(明星)식품 오쿠이(奧井) 사장이라는 정말 큰인물을 만난 덕분에 가져오게 됐는데, 그 과정도 사실 내가 양심적으로 살아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기술을 주기 전에 나에 대한 뒷조사를 다 하고, 내가 보험회사 사장이었다는 것도 자기들이 조사해서 알고는 깜짝 놀라. 그러고는 만나는 친구들의 됨됨이까지 전부 알아보고는 참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서 그제야 가르쳐줬어. 자기 심복인 비서실장한테도 가르쳐주지 않던 기술을 말이야.

그러면서 그 양반이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데 한국의 삼양식품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그래요. 은인이야. 그러더니 정말 기술자를 보내서 시설부터 첫 생산될 때까지 전부 도와줬어요. 그래서 첫 출하를 1963년 9월15일에 했어. 창업은 1961년도에 했지만 2년 만에 라면시대를 연 거야. 그러고 첫 출하 날을 우리 삼양식품 창사일로 삼고. 허허허….”

일본이 최대 라면회사인 닛신(日淸)을 통해 국수 가락에 양념을 첨가해 건조면으로 팔다 기름에 튀겨 라면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낸 것은 한국보다 4년 먼저다. 그러니까 삼양라면이 일본보다 4년 뒤에 나온 것이다. 어쨌든 숱한 어려움을 거쳐 삼양식품이 첫선을 보였지만 라면이 무엇인지 몰라 옷감 종류냐고 묻는 국민에게 라면을 알리느라 전 회장은 또 재산을 거의 쏟아 붓다시피 한다.

더구나 허기진 국민에게 제대로 영양공급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양질의 스프를 만든 것도 자금 압박을 가져왔다.

“밀가루로 수제비만 해먹어도 견디는데 거기에 비해 라면의 영양가는 대단한 편이었어. 그때 우리 뱃속에는 지방분이 없었어. 사람이 지방을 하루에 최소한 70g은 먹어야 하는데 5g도 못 먹었으니까. 밀가루는 지방분이 3~4%밖에 안 돼요. 지금은 소득이 높아져 오히려 비만으로 고생할 정도가 돼서 지방질을 멀리해 18g밖에 안 넣고 비타민·칼슘·단백질 같은 영양분을 다양하게 추가하지만, 초기에는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으니 식량 대용으로 이보다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든 거예요.

그래서 이걸 우리 국민한테 보급만 하면 나로서는 이보다 더 큰 보람이 없겠다 했고, 다른 생각 할 겨를도 없이 첫 제품을 낼 때부터 일본보다 양이 많은 100g으로 해서 주황색 포장지에 ‘즉석 삼양라면’이라는 상표를 새겨 판매했어. 그런데 국민이 라면을 알아야지. 허허허…. 그걸 알리는 기간이 나로서는 정말 고통이었어. 솔직히 그때 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그만둘까 몇 번이나 망설였지. 가진 재산 거의 다 털고 보험회사 채권까지 거의 넣었으니까. 애들은 커가는데 큰일났잖아.

아마 그 당시 서울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라면을 알리는 현수막이나 광고를 한두 번씩은 봤을 거고, 무료 시식도 해봤을 거야. 그런 식으로 라면을 알렸으니 수익도 없이 얼마나 투자가 됐겠어? 그런 상황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허기진 국민한테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는 내 나름의 사명감 같은 것이었어요. 그런 진심이 없었다면 정말 포기했을 거야….”

결단 4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전력을 다해 라면 홍보를 한 지 1년쯤 지나면서 회사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삼양라면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는 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예상하지도 못했던 기업들의 공격이 삼양식품을 향해 진격해왔다.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요. 1년쯤 되니 이제 좀 알려졌구나, 찾는 사람도 많고 맛이 있다는 소리도 들려오고 그러는데 어느 날 보니 라면공장이 여기저기 생기는 거야. 허헛…. 내가 한동안 기가 막혀 쳐다보고 있었어. 경쟁사가 네다섯 군데나 나온 거야.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 배고픈 사람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1년 남짓 사이에 어렵게 알려놓으니까 경쟁자가 그렇게 나오리라고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당시 복서들이 챔피언 돼서 인터뷰하면 거의 라면 먹고 운동했다고 그랬잖아? 그 정도로 배 채우기가 어려웠고, 당시 자장면이 40원인데 라면 값을 10원 받고 했는데 말이야. 그러면 한 개에 5전쯤 남아요. 이게 돈 될 게 뭐 있어? 자장면은 라면에 비해 원가가 4분의 1도 안 들어. 라면은 기름부터 다르고 스프에 들어가는 게 천지 차예요. 그렇기 때문에 라면은 한 개에 1원도 아니고 5전 정도 남더라니까. 그런데 여기저기서 생겨나니 말이야. 참 별일이 다 있었어. 이게 그냥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야. 나중에 그네들이 워낙 이익이 박하니까 라면값을 올리자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인상할 수 없다고 고집했어. 먹지 못하는 고통을 아느냐고 말이야. 저 사람들한테는 10원도 크고, 10원이 생명 값일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격을 올리느냔 말이야. 그렇게 했더니 결국 맛이나 가격에서 우리를 당할 수 없자 점차 정리되더라고. 그때도 나로서는 위기였지. 집에 생활비도 갖다 주지 못하고 말이지….”

언젠가 전 회장의 부인 이계순 여사를 만난 기억이 있다. 흔히 이웃에서 만날 수 있는 어머니들처럼 평범한 모습의 여사는 인터뷰라는 것을 알고는 “아유~, 애들 일곱을 키운 사람이 뭘, 우리는 말도 잘 못해요” 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당시 상황을 겨우 확인해주는 몇 마디를 했다.

“직원들의 월급은 이날까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고 하셨지만, 집에 가져오는 생활비는…. 월급날이 오늘이면 이틀 전부터 12시 사이렌이 울려야 들어오시고 3~4일 후까지는 눈 뜨기 전에 얼른 새벽에 나가세요. 뒷모습을 보면 제가 느끼죠. 그러니까 사는 게 말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라면 하기 전에 보험회사를 가지고 계셨으니 여유 있는 사람을 주로 만나고 그렇게 좋았던 양반인데, 그걸 마다하고 뜻이 있어 하시는 걸 제가 듣기 불편한 소리를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저만 속이 숯덩이가 되는 거지요, 뭐. 초기 몇 년은 참 힘들었어요.그러고 너무 어려울 때는 중간 중간에 그만둬야겠다는 말씀을 몇 번 하셨어요. 그래서 이제는 그만 정리하나보다 했죠. 그런데 하루는 난데없이 쌀 5가마하고 연탄 600장을 사다 줘요. 그러면서 알아서 하라고, 나는 더 이상 모르겠다고 그러시잖아요? 그게 나중에 보니 갖고 계시던 채권까지 전부 팔았던 거예요. 그때는 눈물이 죽 나더라고요. 연속극 같은 거 보면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멈추지 않더라는 말을 하던데, 그때 그런 말이 제 이야기 같더라고요. 그런 시절도 있었죠, 뭐.”

결단 5

우리나라에서 소에 사료를 먹이지 않고 풀을 먹이는 목장은 서울 여의도 넓이의 6배가 넘는 1,800만m2 규모의 대관령목장이 유일할 것이다. 대관령목장은 뛰어난 자연경관과 주변 환경 때문에 최근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그가 대관령목장을 만든 계기는 무엇일까?

“목장은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한 거야. 식품회사를 하면서 목장 운영하는 회사가 삼양식품 말고 어디 있어요? 다시 말하면 하지 않아도 될 목장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야. 내가 라면에 어떤 정신을 심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대관령목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요.

사실 라면을 하다 보니 라면 한 개 가지고 한 끼 먹는 어려운 사람에게는 도저히 영양학적으로 모자랄 것 같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140억 개의 뇌세포와 60조나 되는 일반세포로 구성되잖아? 그 중 매일 10만~20만개의 세포가 사멸하는데 특히 왕성하게 일할 나이에 영양이 결핍되면 어찌 되겠어? 세포가 더 급속히 죽을 거 아니오? 그래서 스프에 소고기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일본도 그렇고, 지금까지 소고기를 넣는 라면은 삼양라면을 제외하고는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일본은 소고기 맛이 나는 향료를 넣어. 우리나라도 다른 회사는 소고기를 안 넣어요.

삼양이 소고기라면을 시작한 동기가 바로 거기 있어요. 잘 먹이자고 말이야. 그래서 소를 직접 길러야겠다, 직접 키워 건강한 소고기를 듬뿍 넣자 하고 시작한 게 목장사업의 계기예요. 그런데 이 나라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뭐든지 고생하고 힘들어. 개척자는 외롭고 힘들다지만, 무척 고생했어. 정부 지원? 아이구, 순 엉터리들이야. 오히려 십수 년 동안 어렵게 가꾸어 놓으니까 세금으로 빼앗아갈 생각이나 하고…. 그런 이야기, 한두 시간에 다 할 수도 없고, 정말 제대로 된 식품을 내놔야겠다는 일념으로 목장을 했다는 얘기만 하지요.”

결단 6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먹을거리 사건만 터지면 언론이 예로 드는 사건이 ‘우지사건’이다. 그만큼 사회에 던진 파장이 크기도 했지만, 냉정히 분석하면 우지사건을 인용한다는 것 자체가 우지를 넣어서는 안 되는데 넣었거나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는 우지를 넣어 마치 불량식품이 된 것처럼 아직도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지파동은 ‘사건’만 있고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적 시각이다. 물론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간의 피해는 여전히 지워질 수 없는 한처럼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2000년 7월4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다른 사유와 함께 서울지검 재직 때 ‘우지라면사건’을 지휘했던 검사가 사법부 최고기관인 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임명제청된 데 대해 공개적으로 임명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만으로도 우지사건이 진실을 왜곡한 정치적 사건이었음을 입증하는 셈이 됐다.

어쨌든 1989년 11월3일 ‘라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긴다’는 익명의 투서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됐고, 삼양식품을 비롯한 식품 관련 5개사 대표 등이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전 회장은 그때의 가혹한 악몽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실이 무엇인지는 국민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창피를 모르는 노태우 정권과 무지한 검찰의 정치적 합작이야. 말할 것도 없어. 처음에는 너무 황당하고 절대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아예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어. 정치적으로 맞을 일이 있었는지, 조사도 하기 전에 결과부터 언론에 흘리고, 꼭 함정수사 같은 느낌도 들고 말이지.

그런데 사건을 어마어마하게 확대하니 우리는 원래 규정보다 10배나 좋은 우지를 써왔기 때문에 제품으로는 위반될 게 절대 없는데 혹시나 해서 우리가 그때까지 정제한 물건을 전부 미국에 다시 보내 분석을 의뢰했어.

97개 항목에 걸쳐 해왔는데 하나도 유해한 게 안 나와요. 그래서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내 방에 써 붙인 것처럼 정직과 신용이라는 신념에 욕될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절대 무해하다는 말을 했지. 그런데도 계속 확대되고, 그러면서 검찰이나 언론이 일제히 비도덕한 기업이니 악덕기업이니 그런단 말이야. 그때는 정말이지, 사회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고 전율을 느꼈어요.”

이때의 사건으로 전 회장은 형언할 수조차 없는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보았다. 특히 수사의 핵심이 된 삼양라면은 결과적으로 검찰 발표와 언론 보도로 당시 60%에 달했던 시장점유율이 10%대로 급격히 하락했고, 100억 원 이상의 시중 제품이 반품·폐기되는 등 그 피해는 수천억 원대에 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회사의 명예가 끝없이 실추된 것은 계산할 수 없는 큰 손실이었다. 전 회장이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진실을 밝히려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검찰이 우지를 공업용이라고 했는데, 공업용이나 비식용유라는 용어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어요. 모든 식용기름은 원유에서 출발해요. 콩기름도 짜면 처음에는 원유, 채종유도 짜면 원유, 샐러드유도 원유요. 그 원유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나라도 규정이 없어요. 그걸 반드시 정제 과정을 거쳐야 먹는 거야. 정제 과정을 거친 기름에 대해서는 국가 규정이 다 있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요.

그러니까 우지의 경우도 원유를 들여다 정제해서 그 산가, 주로 산가로 계산하는데, 산가 0.3 이하를 튀김용으로 써야 한다고 돼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산가가 많아야 0.03 정도, 그러니까 10배는 더 좋은 기름을 썼어. 그런데 공업용이 도대체 무슨 소리냐 이 말이야. 우지는 1등급에서 16등급까지 있는데, 1등급은 이터블(eatable)탤로라고 해서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우지라는 뜻이고, 소 한 마리 잡아야 한 주먹 나올 정도요. 그 다음 2~3등급은 정제해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기름이야. 그걸 1등급이 아니니 다 먹을 수 없는 우지라고 판단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거야.

우지파동 때 우리가 사용한 것이 2~3등급이라고 했지? 2등급 ‘톱 화이트 탤로’나 3등급 ‘엑스트라 펜시 탤로’는 식용을 목적으로 건강한 소에서 채취한 신선한 지방 부분이야. 그렇기 때문에 ‘한국식품과학회’에서 식용 우지로 사용해도 아무런 장애나 문제가 있을 수 없다는 공식 견해를 밝혔던 것이고, ‘미국동물유지협회’에서도 똑같은 의견을 냈단 말이야. 그 사람들이 전부 평생을 그 분야에서만 연구해온 학자들인데 유해한 것을 유해하지 않다고 하겠어?”

전 회장은 권력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그러나 무죄로 밝혀졌으니 이제는 다 말할 수 있을 텐데도 그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다.

“우리 국민의 건강이야.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해. 우지사건 이후부터는 정부가 팜유를 쓰라고 그랬는데, 우지보다 팜유가 더 싸요. 우지사건 당시에도 팜유가 있었고, 훨씬 가격이 싸고 우지가 높았어. 지금도 팜유가 더 싸. 그러면 우지를 쓸 게 아니라 팜유를 써야 회사는 이익이 더 남는 거 아니오? 그런데 왜 비싼 돈 주고 우리가 우지를 썼겠어. 기자들이 이런 의문만 가지고 취재했어도 나라가 온통 난리가 난 것처럼 되지는 않았을 거야.

미국식품의약국(FDA)의 감시가 철저한 미국에서는 정작 팜유를 안 써요. 이건 중요한 얘기야. 미국에서는 팜유를 쓰지 않는다고 광고해. 왜냐? 팜유를 많이 먹으면 늙어서 동맥경화증·뇌졸중·의식불명 같은 증상이 심해진다고 해서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먹는 과자에도 팜유를 쓰지 않아. 일본도 그렇고. 선진국에서는 절대 팜유로만 제조하지 않아. 그 문헌이 다 있어. 이런 것은 국민 건강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알려야 하는 거 아냐?

내가 팜유보다 더 비싼 우지를 쓴 것은 지금도 소신으로 가지고 있는 창업정신과 국민건강 때문이야. 꿀꿀이죽을 왜 먹었어? 그나마 우지라도 먹지 않으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골다공증이 생겨. 나이 먹으면 앉은뱅이가 된다고. 뼈가 쉽게 부식돼. 두 다리에 힘이 있어야 건강하고 왕성하게 일해서 경제를 살릴 거 아니오!”

비록 라면 하나지만 국민 건강을 생각해야 한다는 전 회장의 말에는 누구도 잊어서는 안 될 메시지가 깊게 담겨 있었다

이 호 [leeho5233@hanmail.net]

경주 출생. 한양대 재학 시절 MBC 라디오 드라마 <젊은 태양>으로 데뷔한 후 방송작가로 활동해 왔다. 그의 작품으로는 KBS 라디오 <격동 30년><경제실록 50년>을 비롯해 MBC TV <제4공화국> 등 다수가 있다. 1988년 대한민국방송대상 극본부문을 수상했다. 현재 월간중앙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글 이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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