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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 '불법 감청조사' 미묘한 파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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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안기부.검찰.경찰.기무사 등 4대 '공안기관' 들을 상대로 한 국민회의의 불법 감청 여부 조사가 정치권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집권당이 정부기관을 상대로 조사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법적 근거 등 시비의 소지가 있는 것. 또 여권내 파워게임 양상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민회의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특명' 임을 내세워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다.

26일 서면질의에 이어 '필요시 실사 (實査)' → '감청 관련 조사보고서 발간' 등의 순서를 밟겠다는 것. 안기부와 검찰 입장에선 이같은 당의 태도가 달가울 리 없다.

누차에 걸쳐 불법 감청이나 도청은 한건도 없다고 역설해온 만큼 조사 자체가 외부에 부정적으로 비칠 소지가 있다는 푸념이다.

하지만 이들 기관이 내놓고 말은 못해도 심정적으로 조사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한 집안격인 국민회의가 모든 것을 까발릴 것으로는 생각지 않지만 단 한건이라도 적법하지 않은 감청.도청 사실이 발견될 경우 껄끄러운 사태가 이어질 개연성이 큰 것이다.

자칫 당에 덜미를 잡히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확인된다면 金대통령이 "국민의 정부에서 도청은 있을 수 없으며 용납할 수 없다" 고 여러차례 밝힌 만큼 강력한 조치가 취해질 수도 있다.

공안 당국은 특히 당이 불법 감청이나 도청 피해사례 등을 수집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검증되지 않은 일방의 주장이 자칫 수사기관의 권위 실추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지적이다.

공안기관들은 또 이번 조사도 그렇지만 같은 유형의 조사가 관례화할까도 우려한다.

이런 조사가 거듭되면 자신들의 활동 영역이 제한되고 권한도 축소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 그래서 공안기관들은 이번 조사에 대해 비협조는 물론 적잖은 저항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번 조사가 허술하게 끝날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정치인 사정 (司正)' '북풍' '총풍' '세풍' 등 각종 정치 현안에서 안기부.검찰 등에 소외돼 불만이 누적돼온 국민회의로서는 이들 권력기관을 견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되기 때문이다.

대상기관들의 '투정' 에 국민회의는 이번 조사를 통해 '국민의 정부' 의 투명성을 재확인할 수 있지 않으냐며 다독거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의 권위를 등에 업고 이들 기관의 은밀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그 자체가 여권내 집권당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것으로 기대한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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