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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가출 항해 스토리 (8)

중앙일보

입력

해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안개가 짙어서 언제 해가 떴는지도 몰랐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낮과 밤이 바뀌는 시간대엔 바람이 좀 불게 마련입니다만, 오늘은 영 바람이 없습니다. 좋지 않은 징조입니다.
거친 바다와 잔잔한 바다.
세일러들은 어느 쪽을 더 선호할까요?
뭐,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제 경우엔 좀 거친 쪽을 좋아합니다. 요트라면 일단 좀 바람을 받아 달리는 맛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세일러들은 세계에서 가장 사나운 바다로 남미 대륙의 남쪽 끝 케이프혼, 특히 드레이크 해협을 꼽곤합니다. 직접 만든 요트를 타고 그 사나운 바다를 일부러 찾아 나선 아버지와 아들의 항해기를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ltlt;아버지와 바다&gtgt;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책을 읽으며 사나운 바다를 묘사한 부분에서 진저리를 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도 한번 겪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오늘 바다는 전혀 바다답지 않습니다.


'요트' 하면 떠오르는 요염한 썬탠 미녀 대신 시커먼 장정들이 갑판 여기 저기에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해가 높이 떠서 더위가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무풍의 바다에서 맞는 땡볕은 가혹했습니다. 바람이라도 불어주면 더위를 느낄 틈이 없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이렇게 먼 바다에 나와 배 위에서 더위를 느끼기는 처음인 듯합니다.

크루들이 축축 늘어집니다. 세일링조, 식사조, 휴식조 등 3개조로 나누어 움직였는데 휴식 차례가 되면 너 나 할 것 없이 쓰러졌습니다. 배엔 그늘이 별로 없습니다. 선실은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지만 비좁고 답답해 어쩔 수 없이 갑판에서 볕을 견딥니다.
남북반구 무역풍의 발원지인 적도에는 남북 무역풍의 사이에 바람이 없는 곳이 있습니다. 돌드럼스(DOLDRUMS)라고 부릅니다. 우리 말로 무풍지대. 지금 집단가출호는 마치 적도의 돌드럼스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허선장님의 낮잠은 그의 오랜 습관이자 건강 유지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화실에서 그림 작업을 할 때 점심 식사 후 30분 정도 짧은 낮잠을 자는데, 휴식 차례가 되자 선실의 작은 침대에 몸을 눕히고 달콤한 오수를 즐기고 있습니다. 사진으로만 보면 누울만한 곳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좁아서 매우 불편합니다.

송철웅(레저 전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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