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수사 핵심 법의학]'흔적'에 숨겨진 진실을 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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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과학수사의 핵심인 법의학에 세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판문점총격요청사건' 과 관련한 고문의 진위, 클린턴 스캔들, 요절한 미국 육상 스타 조이너의 부검 등은 법의학의 대표적인 예. 국내에서도 매년 친자감정을 포함, 수만 명이 이 '음지의 의학' 에 의존하고 있다.

법의학의 세계를 조망해 본다.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 관련 피의자인 장석중 (張錫重).한성기 (韓成基) 씨가 주장하는 가혹행위의 골자는 8월31~9월14일 (한씨) 과 9월4~6일 (장씨)에 이뤄졌다는 구타와 이로 인한 장출혈. 이에 대한 사실 여부를 법의학적으로 가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몸에 남은 흔적이 된다.

건국대의대 박의우 (朴宜雨.법의학) 교수는 "피멍은 보통 2~4주면 사라진다" 며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없다면 조직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다" 고 말했다.

따라서 현재 육안으로 이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장출혈 역시 증명하기란 쉽지 않을 듯.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국과수) 이한영 (李漢榮) 법의학과장은 "장은 어느 정도 찢어지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재생되기 때문에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고 말했다.

그러나 피부에 상처를 남겼다면 흉터는 없애기 힘들다.

한 피부과 전문의는 "가슴.어깨 부위는 인체 중에서도 특히 흉터가 크게 남는 특징이 있다" 며 "긁히기만 했어도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 크다" 고 말했다.

피부는 탄력이 뛰어나고 회복도 빠른 것이 특징.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피부가 '진실' 을 말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클린턴을 꼼짝 못하게 한 체액 (정액) 증거는 최근 과학수사에서 가장 애용되는 증거물. 국과수의 한 관계자는 "정액은 일단 말라붙으면 1년이 넘어도 혈액형이나 유전자 분석이 가능하다" 고 말했다.

그러나 정자는 질액과 만나면 30분이 지나기 무섭게 꼬리와 머리가 떨어지는 등 파괴가 일어나기 시작, 4일쯤 지나면 흔적을 찾기 힘든다.

따라서 성폭행 사건이라면 감정이 빠를수록 증거를 확보하기 쉽다.

오래전부터 증거물로 이용돼온 모발 역시 최근 유전자 감식 기법의 발달로 아주 작은 양이라도 개인식별을 가능케 하고 있다.

하지만 혈액형 확인을 위한 것이라면 적어도 4㎝ 이상은 돼야 적정량의 혈액 항원을 얻을 수 있다.

법의학 관련 사건 중 음주와 연관된 사건이 많다는 것도 특징. 朴교수는 "알콜이 직.간접적으로 사건과 연결되는 경우가 절반 이상이라는 보고도 있다" 고 말했다.

알콜은 혈액과 소변에서 쉽게 검출되는데 체내에는 대략 24시간 가량 머문다.

한편 수면제처럼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이라면 뇌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따라서 조이너가 스테로이드류의 근육강화제를 썼다면 근육 어디엔가 그 흔적이 남아있을 수 있다.

친자 (親子) 감정도 법의학의 주 활용범위다.

이 경우 혈액형으로 감정하는 것이 가장 손쉽지만 이로써도 확인이 어려우면 유전자 대조를 벌인다.

고려대의대 황적준 (黃迪駿) 교수는 "개인별로 고유한 형태를 띠는 표식 유전자만도 수십 종 이상 확인됐다" 며 "이를 이용하면 좀 더 결정적인 증거를 얻을 수도 있다" 고 말했다.

그러나 유전자 감식은 학자간에 유전자 배열형태를 놓고 해석이 다를 수 있는 등의 허점도 있을 수 있다.

친자감정의 경우 비용도 1백만원 정도로 만만치 않다.

또 최근에는 인체 조직 외에 사건 현장 주변에서 발견되는 식물까지 과학수사에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식물 특유의 식문 (植紋) 은 사람의 지문처럼 식물의 특성을 말해주기 때문에 사건이 어디서, 또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는지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는 것. 전문가들은 "첨단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회 구석구석에서 법의학의 활용폭이 넓어지고 있다" 면서도 "하지만 사건의 흔적이 남긴 진실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사람들의 양심" 임을 강조한다.

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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