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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세상보기]A씨의 시사 교과서(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97년 11월 1일 세상보기에서 A씨는 후세에 교훈으로 남길 만한 시사교과서를 편찬한 바 있다.

최근 A씨는 다시 그 속편으로 의미론적 해석을 담은 시사교과서를 만들기로 했다.

A씨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해석이 없으면 지금 뉴스에 등장하고 있는 시사용어가 무슨 뜻인지 후세들이 잘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A씨의 초벌작업을 잠깐 실례해 보니 - . 먼저 신 (新) 북풍은 구 (舊) 북풍과는 다른 바람이다.

구북풍은 북쪽에서 DJ를 흠모하는 편지를 띄우게 하는 안기부의 공작을 말하지만 신북풍은 판문점에 TV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인민군이 남쪽에 대고 총질을 하는 장면을 연출시켜 밤 9시 TV뉴스에 보도케 하자는 음모를 말한다.

신북풍의 주체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주변의 3인방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총질을 하게 했다고 해서 총풍 (銃風) 이라고도 부른다.

매우 썰렁한 조어 (造語) 지만 음모가 사실이라면 결코 썰렁하지 않다.

다음 세풍 (稅風) 은 국세청장과 차장.한나라당 중견 간부가 짜고 기업들로부터 수십억원의 대선 자금을 모금한 사건이다.

세도 (稅盜) 라고도 부르는데 썰렁하게 들리기는 마찬가지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 사건은 법률적으론 국가 기강을 문란케 한 위법행위고, 정치적으론 한나라당도 여당 프리미엄을 한껏 누린 얌체짓이 된다.

다음 소문 (所聞) 정치는 이런 일련의 놀라운 사건들이 국가 사정기관의 공식 발표전에 단편적인 뉴스 흘리기나 추측에 의해 신문과 방송에서 미리 증폭되고, 이것이 정치 풍향을 좌우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사정의 강약 조절로 정계개편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의 검찰정치보다는 미디어의 광파성에 의존하는 소문정치가 진일보한 방식이다.

검찰은 범죄 (犯罪 아닌 凡罪) 를 사정하지만 소문정치는 소문 (小聞) 을 대문 (大聞) 으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 '추리일보' '알려졌다 신문' '카더라 방송' 의 새 미디어 (사실은 헌 미디어)가 활개친다.

다음 아주 이색적인 항목이 야당 하기가 쉽다고? 이다.

박완서 (朴婉緖) 의 단편소설 '애보기가 쉽다고?' 에서 제목을 따왔다.

본격적인 야당 노릇을 해야 할 한나라당이 지금 손자의 떼 앞에서 어쩔줄을 모르는 할아버지처럼 쩔쩔맨다는 것이다.

여당의 공세로 몸집마저 줄어든 그들은 벌써 몇달째 야당 파괴.표적 사정.이회창 죽이기.고문 조작 등의 단조음 (單調音) 만 되풀이하고 있다.

야당 하기가 쉽다고, 너무 쉽게 생각한다.

나는 너를 싫어한다도 역시 김광주 (金光洲) 의 소설 제목에서 따왔다.

여당이 상대당 당수를 국정 파트너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니까 야당도 나도 그렇다고 응수하는 것을 말한다.

한자론 혐야감 (嫌野感).혐여감 (嫌與感) 이라고도 쓴다.

선거제도는 못 믿는다는 항목은 선거에 의한 정계개편보다는 선거 후의 개편이 믿음직하다는 이론이다.

과반수 허물기 (=과반수 채우기) , 선거가 짝지워준 상대방 인정 안하기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97년의 경선 불복처럼 작은 불신도 있다.

위기의 민주정치론은 무엇인가.

민주정치에 대한 신봉은 민주적인 절차와 제도 그리고 관행에 대한 신봉에 다름아닌데 지금 이것이 무시되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작금의 한국 정치는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을 위한, 정치인에 의한, 정치인의 정치가 됐다.

마지막 항목은 용두사미 (龍頭蛇尾)가 좋을 때도 있다를 꼽았다.

한때 정치인 모두를 잡아들일 것처럼 서슬이 시퍼렇던 청구.경성비리가 흐지부지 끝나는 것을 보고 이른 말이다.

큰 미래가 중요하다면 작은 과거는 용두사미가 된들 어떠리 하는 추측이 있다.

그러면 그것 또한 큰 정치가 아니겠는가.

물론 이것도 소문정치의 한 가닥이지만 어쨌든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생각에도 일리는 있다.

김성호(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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