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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식계를 강타한 퇴계의 편지 『자성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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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퇴계의 저술 중 이런 책도 있었나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조선에서 이 책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바다 건너 일본에서 주로 읽혔다. 일본의 주자학은 임진왜란 때 실어간 책들과, 『간양록』의 강항처럼 잡혀간 선비들과의 교류를 통해 형성되었는데, 대표 격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1618~82)는 퇴계의 저작을 독파하고, 그 학문과 사상, 인격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그의 제자 사토오 나오카타(佐藤直方·1650~1719)는 ‘동지문(冬至文)’이라는 글에서 놀랍게도 스승 야마자키 안사이를 제치고 퇴계를 ‘유학의 단 한 사람’으로 꼽았다. “조선의 이퇴계 이후 성인의 학문을 진정 떠맡아서 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런 감격과 존경의 한가운데에 퇴계의 『자성록(自省錄)』이 있다.

『자성록』, 퇴계 자신이 쓴 편지들
『자성록』은 저술이 아니라 편지 묶음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 황제의 『명상록』처럼 야전막사 안에서의 통찰과 사색 노트와는 성격이 다르다. 옛적에는 중요한 편지를 전후 맥락을 알기 위해, 그리고 후대의 편찬을 위해 따로 글상자에 베껴 보관해 두었다. 퇴계는 58세의 어느 날, 이 편지들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가려 뽑아 ‘자성(自省), 즉 스스로의 성찰을 위한 거울’로 삼았다. 1558년 그의 나이 58세 때 학문이 한창 무르익을 때의 일이다.

서문은 나중에 발견되었다. 그는 거기 이렇게 적었다. “내 그동안 학문의 이름으로 여러 학자 친구들과 수많은 얘기를 했다. 그것만도 부끄러운 일인데, 주고받은 내용 가운데 저는 기억하고 있는데 나는 잊어버린 것도 있고, 저도 나도 함께 까먹어 버린 것도 있다. 이는 부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인생을 함부로 사는 태만에 가깝다. 정말로 두렵다. 그래 옛 글상자를 뒤져 남아 있는 편지를 베껴 책상에 두고 수시로 읽으며 스스로를 반성하려 한다. 이로써 글이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을 면했다. 카피본이 없어 베끼지 못한 것도 더러 있지만, 그 취지도 지금 베낀 편지들 속에 다 들어 있을 터이다. 그렇지 않다면 편지를 몽땅 베껴 큰 키로 쌓아놓는다고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책, 그 깊이와 생숙
이 글이 퇴계의 풍모를 한눈에 보여준다. 세 가지만 짚어본다. 1)이 토로는 퇴계의 ‘겸양’이 아니다. 퇴계는 진짜로 자신이 학문의 폭과 깊이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퇴계가 있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공부가 이만하면”이라고 안주하는 순간, “이제 알겠다”고 자만하는 순간 성장은 멈추고, 위태로움이 시작된다.
2)책은 지식 정보를 담고 있기보다 ‘체험적 대면’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말은 깊이, 혹은 생숙(生熟)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말의 겉을 핥고 어떤 사람은 속살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책의 살을 발라먹고 어떤 사람은 골수를 우려낸다. 언어는 평면적인데 체험은 층위를 갖고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조선 유학이 오래된 같은 언어를 쓰고 있으되, 그들은 전혀 다른 사고와 체험을 표명하고 있다. 이것이 유학을 위시한 동양학의 매력이자 난관이다.

3)”편지는 다 있어야 하지만, 다 없어도 좋다.” 공부가 심신의 수련을 뜻하므로 체계나 일관성은 이 공부의 주안점이 아니다. 검도나 무술에서처럼 수많은 동작과 연습이 기량의 향상에 도움을 준다. 하나를 익히면 다른 것이 수월하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한 연습도 어느덧 목표를 향해 자신을 한 발짝 더 밀어놓는다. 그때 아직 익히지 않은 것들이 어느덧 제 몸에 배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22편의 편지 안에 퇴계 학문의 대강, 혹은 개략이 다 들어 있다는 말이 아닌가.

남언경에게 보낸 편지
『자성록』의 첫 편지를 소개할까 한다. 수신자는 남언경(南彦經·1528~94)이다. 그는 서경덕의 문인으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관로에 올랐다가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파직당했다. 임진왜란 때 기의했으나 양명학을 했다는 혐의로 사림의 탄핵을 받았고, 여생을 학문 연구로 보낸 사람이다.

퇴계가 화담의 기일원론을 위태롭게 생각하고 양명학을 극력 배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남언경에게 보낸 편지는 두 ‘이단’에 대한 자신의 대안적 공부법을 제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퇴계는 우선 ‘공부’할 때 빠질 수 있는 두 가지 위험을 경계한다.

“마음에 생기는 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물의 실상(理)’에 투철하지 못해 엉뚱한 곳을 무리하게 파고드는 데서 생기고, 다른 하나는 ‘마음(心)을 컨트롤하는 법’을 잘 몰라 벼포기를 잡아뽑듯 마음을 억지로 고양시키려 하는 데서 생깁니다. 이 둘은 초학자들이 대체로 빠져드는 실수입니다. 주자도 처음에는그랬으니까요. 아차 깨닫고 빨리 빠져나오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으면 고질이 될 것입니다. 내 평생 달고 사는 병의 근원이 여기 있습니다…그대가 이전에 공부하는 것을 보니, 궁리(窮理)는 너무 추상적 형이상학적인데다, 역행(力行)은 자만심과 강박에 추동되고 있습니다. 무리한 탐구와 억지 행동의 병근이 이미 자리 잡았는데, 여기 다른 병폐가 덮치면 심중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퇴계가 경고한 마음의 병은 우리 모두가 앓고 있다면 지나칠까. 거창한 이념을 외치고, 초월적 세계를 꿈꾸며, 정치적 위업에 안달하고, 한방과 대박에 목을 멘다. 퇴계는 여기 함정이 있으며, 공부는 그 ‘거대’에 대한 환상과 강박을 떨치는 데서 시작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진리는 일용평이명백처(日用平易明白處)에 깃들어 있다.”
주자학의 키워드는 ‘일상(日用)’이다. 하이데거는 평균인의 비본래적인 삶으로서의 ‘일상성(Alltaglichkeit)’을 탄식했지만, 사르트르는 그 ‘잉여’에 구토하고 영웅적 행동으로 자유를 증거하라고 요구하지만, 주자학의 생각은 다르다. 나날의 삶, 그 신기할 것도 없고 후줄근한 삶이 전부이니 또 다른 세계는 없다. 유교는 그래서 환상이 없다. 종교도 만들지 않고, 낭만도 없고, 무엇보다 유머가 인색하다. 다만 근사(近思), 즉 구체적인 것에, 짜잘한 것에 그토록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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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한형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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