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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 헬멧' 미국선 격찬…중기 지원기관에선 핀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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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 라인더스트리의 이동선 사장은 "기술력 있는 중소업체들이 단기자금이 모자라 쓰러지지 않도록 은행대출이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동연 기자]

"중소기업 지원 기관을 찾아갔더니 '기술을 저울질할 만한 전문가도 없고, 그런 복잡한 기술로 뭘 하겠느냐'고 핀잔만 들었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라인더스트리의 이동선(50) 사장의 말이다. 그는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오토바이 헬멧을 어렵사리 개발해 놓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요즘 해외 바이어들은 헬멧을 보내 달라고 재촉하지만 이 사장은 정작 원자재를 살 돈이 없어 냉가슴만 앓고 있다. 제품 개발 기술을 내세워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 했지만 어느 곳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담보가 없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오토바이 헬멧 사업에 매달린 그는 지금 빈털터리다. 전 재산을 헬멧 개발에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친인척은 물론 친구 돈까지 끌어들여 더 이상 손을 내밀 곳도 없다. 아내가 백화점 일용직으로 나서 버는 돈으로 어렵사리 생활을 꾸리고 있다.

이 사장이 헬멧 사업에 나선 것은 1993년이다. 봉제 수출업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그는 서울에서 열린 한 국제 전시회에서 우연히 헬멧을 보고 무릎을 쳤다. 그는 "봉제와 잡화를 생산하면서 터득한 노하우면 이것도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가졌다.

그는 봉제업을 정리하고 넉 달 만에 제품을 내놨다. 봉제 수출을 하면서 친분이 쌓인 해외 바이어들을 통해 1년 만에 100만달러어치를 수출했다. '라(LAH)'란 독자 브랜드도 개발했다. 그러나 97년 미국 뉴욕에서 수출대행업자가 대금을 가로채는 바람에 자금 압박을 받았다. 급기야 회사가 부도났다. 임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실의에 빠진 이 사장을 일으킨 것은 바로 해외 바이어였다. 바이어들은 '좋은 제품을 왜 생산하지 않느냐'는 격려 전화를 했고, 전시회 참가 비용도 지원했다.

그는 이왕 다시 하는 김에 세계에서 하나도 없는 새로운 형태의 헬멧을 만들고 싶었다. 고교 동창인 서울대 재료공학과 윤재륜 교수와 손을 잡았다. 5년간의 연구 끝에 지난해 초 헬멧의 무게를 기존 제품의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는 신소재를 개발했다. 헬멧의 통풍 방식도 개선했다. 기존의 제품과는 달리 헬멧 내부에서 공기가 자유롭게 통하도록 만들어 착용감을 시원하게 했다.

이 제품은 지난해 미국의 스넬(SNELL) 테스트에서 합격 판정을 받았다. 스넬 테스트란 고급 오토바이 헬멧만을 대상으로 하는 안전 규격 검사다. 미국에서 이름난 오토바이 잡지인 '모터사이클리스트'는 이 제품을 '감성이 다른 헬멧'이라고 소개했다. 샘플을 보내 달라는 바이어의 주문이 잇따랐다. 또 올 2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오토바이 산업박람회'에 출품해 호평받았다. '헬멧 제조공법 및 통풍 기능성에 관한 기술'은 국내외에 특허 출원됐다.

이 사장은 용인의 임대 공장에서 지금도 매월 100개 안팎의 제품을 손수 만들고 있다. 바이어에게 보낼 샘플과 해외 전시회에 출품할 제품들이다. 버려진 기계와 철근 덩어리를 주워와 생산 라인을 만들었다. 공장의 땅 주인은 임대료를 안 내는 그를 여러 번 내쫓으려 했다가도 그의 열성적인 사업가 정신에 감동해 몇 년째 눈 감아 주고 있다.

이 사장은 "미국 시장에서 일류 상품 대접을 받는 일본의 '쇼웨이'헬멧과 멋지게 한판 승부를 벌일 기회가 왔는데 실탄이 떨어졌다"고 한탄했다. 그는 주변에서 부동산 투자 등으로 손쉽게 돈을 벌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힘이 빠진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중소 제조업체가 나라 경제를 이끄는데 이를 돌보기는커녕 냉대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부도 중소기업이라고 해서 그간 쌓아온 개발 노하우와 사업 기반을 다 버리고 퇴장하란 말이냐"고 반문했다.

그는 벤처 붐이 일었던 2000년에 회사 지분의 70%를 내놓으면 투자하겠다는 한 사채업자의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코스닥에 등록한 뒤 적당히 시세를 조작해 돈만 챙기겠다는 의중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는 "돈이 없어 쩔쩔매는 신세지만 제조업체 사장이 갈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고윤희 기자<yunhee@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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