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논이 춤 춘다, 넉넉한 가을을 빌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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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호 18면

충북 괴산군의 525번 지방도로를 달리다 이담 저수지를 지날 무렵 무심코 들판으로 시선을 돌리다간 깜짝 놀라게 된다. 북·징·장구·꽹과리를 두드리며 신바람 나게 춤추는 그림이 벼가 한창 자라는 들판을 가득 덮고 있기 때문이다. 간밤에 UFO가 나타나 미스터리 서클을 그렸다고 신고할 필요는 없다. 그림은 괴산군 농업기술센터 최병열(46)씨의 아이디어로 그려졌다.

괴산군 이담리 들판 ‘有色 벼’의 거대한 그림

최씨는 농촌지도사다. 농업 기술을 전수하고 병충해를 예방·진단하는 등 농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이 주요 업무다. 그런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2006년 최씨는 선진농업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연수를 갔다. 거기서 유색(有色)벼를 처음 봤다. 식용이 아닌 관상용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자주색·노란색·빨간색 벼를 보는 순간 반짝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색깔별로 한 움큼씩 볍씨를 훑어왔다.

괴산은 아직도 오지다. 고속도로가 사통팔달 뚫렸지만 괴산은 비켜갔다. WTO다, FTA다 해서 주민들의 어깨도 자꾸 처져 갔다. 최씨는 괴산을 세상에 알리고 농민들의 사기도 높여줄 요량으로 일본에서 가져온 유색벼를 증식해 들판에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들판에 웬 그림?’하며 의아해하던 군청을 설득해 2008년 처음으로 ‘상모 돌리는 사람’을 감물면 이담리 들판에 그렸다.

작업은 간단치 않았다. 우선 일반 벼로 모내기를 끝낸 다음 촘촘하게 격자를 설치해 밑그림대로 표시봉을 꽂았다. 벼를 뽑아낸 자리에 색깔별로 다시 모를 심었다. 농민 100여 명이 동원됐고 완성까지는 열흘 이상이 걸렸다. 벼가 자라면서 멋진 그림이 들판에 서서히 떠올랐다. 반응은 뜨거웠다. 42개 지방자치단체가 배우러 왔고 5000여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괴산군이 생긴 이래 그렇게 관심이 집중된 적은 없었다. ‘엉뚱한’ 아이디어를 내 스타가 된 최씨는 한 호봉 승급했다.

올해는 규모가 훨씬 커졌다. 1만 2000㎡의 논에 초대형 사물놀이 그림을 그렸다. 워낙 넓다 보니 낮은 곳에서 보면 그림이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최씨는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한다. “전망대도 만들어야 하고, 낮은 곳에서 봐도 그림이 제대로 보이도록 내년엔 도안도 개선해야 하고….” 힘들지 않느냐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뭐.”

사진·글 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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