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배, 북 경비정에 예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북한 경비정에 예인된 채낚기 어선 ‘800연안호’ 선원의 송환 여부가 남북관계의 새 변수로 부상했다. 개성공단 근로자 유모씨가 130일 가까이 억류되고, 가뜩이나 남북관계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이 같은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800연안호가 위성 항법장치(GPS) 고장으로 귀항하던 도중 항로를 이탈해 북한 수역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통일부와 군 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전 5시5분쯤 해군 초계함이 미식별 어선 한 척을 발견하고 어선통신망을 통해 호출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북한 수역으로 진입한 연안호는 오전 6시20분쯤 속초 어업정보통신국에 “GPS 고장으로 복귀 항해 중 북한 경비정을 발견했다”는 교신을 해온 뒤 “북한 배에 조사 받는다”고만 짧게 알려왔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전 6시27분쯤에는 북한 경비정 1척에 의해 800연안호가 예인돼 가는 모습이 우리 함정에 포착됐다. 우리 측은 오전 6시44분과 7시16분 두 차례에 걸쳐 함정 간 통신으로 우리 어선을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북측은 응답 없이 장전항으로 예인했다. 사고가 발생하자 통일부는 이날 예정됐던 현인택 장관의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통일부는 “이 문제가 현재 냉각된 남북관계와 무관하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처리돼야 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는 조사 후 고장으로 밝혀질 경우 선원들의 송환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란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북한이 미국과 대화를 추진 중인 상황에서 민간인 인권 문제가 불거질 경우 유리할 게 없다는 판단에서다. 또 최근 5년간 고장으로 인한 월선 사례가 우리(이번 포함 3회)보다는 북한 측(22회)이 많았던 데다 이전에도 우리 선박이 쉽게 풀려난 전례가 있다. 2005년 4월 ‘황만호’와 2006년 12월 ‘우진호’는 항로 착오로 북한 수역으로 넘어갔다가 각각 5일, 18일 만에 돌아왔다. 특히 30일 남북한 어선이 동해와 서해에서 각각 북방한계선(NLL)을 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북한 어선이 무사히 귀환한 것도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나온다.

하지만 같은 날 발생한 유사 사건에 대한 남북한의 상반된 처리에 대해선 인도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우리는 북한 어선을 뒤쫓아온 북한 경비정의 월선도 인도적인 문제로 간주해 귀환토록 경고방송을 한 반면, 북한은 현장에서 우리 어선의 GPS 고장을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예인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북한의 800연안호 처리 방향이 향후 남북관계를 예측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책기관의 한 북한 전문가는 “어선 귀환을 위한 협상이 인도적 차원을 넘어 경색된 남북관계를 다소나마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며 “그러나 북한이 미국인 여기자와 개성공단 유씨 억류에 이어 민간 선박까지 장기간 억류할 경우 남북 간 경색의 장기화 역시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 사이인 선원들= 800연안호의 박광선 선장과 김영길 기관장, 선원 김복만(이상 54세)·이태열(52)씨는 모두 거진국민학교(현 거진초) 동기동창인 친구 사이다. 이들은 그동안 서로 다른 배에 승선하다 올 초부터 연안호에서 함께 조업했다고 한다. 황달수(53) 고성군 채낚기선주협회장은 “기계 고장으로 NLL을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사태가 원만히 해결돼 선원들이 조속히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용수 기자, 고성=이찬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