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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정치인은 왜 몸싸움 안 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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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야당 의원들이 벼르는 가운데 문화부 장관 프레데릭 미테랑이 입을 열었다. 뜻밖에도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배우 아를레티와 가수 세르주 갱즈부르로 연설은 시작됐다. 그는 “프랑스의 소중한 유산인 아를레티의 작품과 갱즈부르의 노래를 인터넷 바다의 해적들에게 약탈당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서 진 세버그가 던진 명대사와 쥘리에트 그레코의 노래 가사도 프랑스의 보물이라며 인용했다. 문화장관다운 연설에 사회당 의원들은 웃으며 “더 해보라”고 외쳤다. 연설이 끝나자 여당 의원들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사회당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회의장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지난해 취재원 보호법안 제안 때는 라시다 다티 법무장관이 빅토르 위고의 시 구절을 인용해 언론 자유를 강조한 일도 기억난다. 이처럼 프랑스 국회에 시나 소설이 등장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시로 법안을 제안하면 반대하는 측도 막말 대신 적절한 다른 시구를 찾는 게 프랑스 의회의 분위기다.

프랑스 정치가 ‘멋’이라면 영국에서는 유머가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토니 블레어가 총리에 오른 지 얼마 안 돼 일본을 방문했을 때다. 주일본 영국대사가 긴장했는지 공식 연회에서 블레어를 “전임 영국 총리”라고 소개했다. 블레어는 곧 마이크 앞으로 다가가 “대사도 전임 총리를 잘 아나 보죠. 저도 그 사람 잘 아는데”라고 말해 행사장 분위기를 살렸다. 1998년 런던에서 아시아·유럽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회담장에 늦게 나타났다. 의장인 블레어는 익살스러운 얼굴로 “시라크 대통령의 일정을 알아보니 엘리자베스 여왕을 만났던데 왜 늦은 걸까요”라고 말했고, 회담장은 웃음바다로 변했다.

데이비드 캐머런이 보수당 당수에 취임한 첫날 그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다. 한 기자가 정치쇼 아니냐는 뉘앙스로 “며칠이나 자전거를 더 탈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캐머런은 “BBC가 헬리콥터를 보내주기 전까지”라고 답했다. 영국 의회의 TV 중계를 보면 시트콤 촬영장처럼 웃음과 박수가 터지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덜 진지해 보일 때도 있지만 정책이 상반된 정당끼리 싸움박질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유머와 웃어줄 수 있는 여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80여 년 전 토마스 만은 “정치를 혐오하는 국민은 혐오스러운 정치를 가질 자격밖에 없다”며 정치에 등돌리는 국민을 꾸짖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정치 현실에서 정치 혐오증의 원죄는 가두투쟁·몸싸움·단상 점거·단식 등의 단어밖에 모르는 멋없는 정치인들에게 있는 것 같다. 멋과 웃음이 살아 있는 유럽 정치를 싸게 수입해올 길은 없을까.

전진배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