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화유산답사기]2부 7.장안사와 삼불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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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그리하여 우리는 금강산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내금강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날도 비안개 짙게 끼어 금강산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엄하기 그지없다는 한하계 깊고 높은 계곡을 물 찧는 소리와 자동차 숨 고르는 소리만 듣고 오른 것은 차라리 억울했는데 온정령 고갯마루에서 금강굴을 빠져 나오자마자 '금강읍 18㎞' 라는 이정표와 함께 날이 활짝 개었으니 그것은 기쁨을 넘어 큰 놀라움이었다.

내금강은 정말로 부드러운 육산이었다.

전나무 숲이 이뤄낸 산자락의 질감은 포근하게 다가오고 찻길은 비포장 흙길인데도 바퀴에 닿는 감촉이 사뭇 부드럽다.

금강산 안내원이 외금강은 남성적이요, 내금강은 여성적이라고 상투적으로 설명한 것은 표현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길밖에 없었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금강읍 내강리에 다다라서는 회양 64㎞, 내금강 10㎞의 갈림길을 만났고 여기서 산자락 하나를 가볍게 넘어 내금강으로 들어서니 제법 큰 냇물이 멀리서 휘어져 돌아나간다.

냇가의 자갈밭엔 누런 소들이 느린 동작으로 마른 풀을 뜯고 있고 옥수수대가 줄지어 서있는 다락밭에선 일꾼들이 잠시 일손을 놓고 흙먼지 내며 달리는 우리에게 눈길을 준다.

장연사 (長淵寺) 삼층석탑이 올려다 보이는 탑거리 마을에는 북한식 농촌문화주택이 2열 횡대로 정연히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지붕이며 담벽이 직선으로 다듬어져 있는 것은 눈에 설었지만 집집마다 청솔가지로 엮어 올린 울타리로 완두콩 줄기가 높이 높이 타고 올라 점점이 주황빛으로 꽃피운 모습이란 어찌나 곱고도 사랑스러워 보였던지…. 그 모두가 남쪽에선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산간마을의 옛 풍경화였다.

그것은 금강산 못지 않은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나는 사무치는 마음으로 망연히 바라보며 좀처럼 눈길을 놓지 못하니 리정남선생은 내가 무슨 인문.자연지리를 살피는 줄로 알고 친절히 설명해 준다.

"이 냇물은 동금강천으로 만폭동과 금장골에서 내려온 물이 만난 것입니다.

이것이 단발령에서 서금강천과 만나면 큰 강이 돼 춘천 소양강으로 흘러드니 여기가 북한강 최상류입니다. " 장안사 입구 만천교 (萬川橋) 다리 앞은 예나 지금이나 내금강 탐승의 길목이다.

분단 전 일제 때는 여관으로 가득했다는데 지금은 내금강휴양소와 유원지관리소가 들어앉아 있다.

매표소를 넘어서자 길 양편으로는 '장안사 영원원 (靈源院) 사적비' '만천교 유래비' 같은 비석들이 도열해 여기가 그 유서깊은 금강산 장안사 경내 (境內) 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만천교 너머 긴 돌축대 위에 있었을 6전 (殿) 7각 (閣) 2루 (樓) 2문 (門) 하고도 10여채의 요사채와 선방이 있었다는 장안사 건물들은 6.25 때 폭격맞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쑥대 무성한 빈 터엔 둥근 주춧돌만이 어지럽다.

오직 절터 저 끝에 밤나무 그늘 아래로 무경당 (無竟堂) 영운 (靈雲) 스님의 부도 (1642년 건립)가 하나 있어 옛 자취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생각하자니 허무하고, 바라보자니 민망한 마음마저 일어나 처연히 먼 데로 눈을 돌리니 아름다운 석가봉과 지장봉이 망군대의 늠름한 산자락을 등에 기대고서 이쪽을 보듬듯 휘어싸고 있다.

그 편안함과 아늑함이란 장안사는 비록 사라졌어도 여기는 길 장 (長) 자, 편안할 안 (安) 자 장안사 터임만은 변함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장안사에서 표훈사까지는 십리길, 울창한 소나무.전나무 숲과 짙푸른 만천 (萬川) 골을 따라 찻길이 닦여 있다.

그 길을 걷지 못하고 차로 이동함은 만폭동 묘길상까지 가는 시간을 절약하려는 것이겠지만, 정상적인 인간의 정서로는 용서될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비극이었다.

얼마 아니 가서 우리는 울소 혹은 명연 (鳴淵) 이라는 바위못에 머물렀다.

산모롱이가 가파른 산세에 감싸여 물살이 사뭇 빠른데 좁게 비비고 선 바윗돌로 내리쏟는 물벼락에 사람 우는 듯한 궁근 소리를 내어 울소라는 이름을 얻었다.

울소에는 길게 누운 바위 하나와 그 뒤로 나란히 늘어선 세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김동 (金同) 의 시체바위와 그의 아들 삼형제바위라고 하며 그 유래는 바로 위쪽 삼불암 (三佛巖)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삼불암은 장안사에서 표훈사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부처바위다.

높이 8m, 길이 9m 되는 두 개의 세모뿔 바위로 문 (門) 바위라고도 부른다.

문바위의 장안사 쪽 면에는 큰 부처 세분이 입상으로 새겨 있고, 표훈사 쪽으로는 60구의 화불 (化佛) 과 보살 두분이 새겨 있다.

부처는 석가.아미타.미륵으로 현재.과거.미래의 구원을 상징하고, 양 보살은 중생의 제도를, 60불은 법계 (法界) 의 장엄함을 나타낸 고려풍의 약식 (略式) 만다라다.

내용이 소략한 만큼 조각솜씨도 큰 기교를 부리지 않은 소탈한 마애불이다.

다만 60불보다 3불의 돋을새김이 강하고 표정이 또렷할 뿐이다.

삼불암의 전설은 장안사의 나옹 (懶翁) 조사와 표훈사의 김동거사의 다툼에서 생겼다.

김동은 개성 부자 출신으로 표훈사에 와서 불사 (佛事) 를 크게 일으켜 그 위치가 높아졌으나 나옹의 도덕을 능가하지 못해 그를 몰아내고 싶어했으며, 나옹은 금강산을 떠나기 전에 욕심 많은 김동을 쫓아내고 싶어했다.

이에 두 사람은 표훈사와 장안사의 경계인 문바위에 각기 부처를 새겨 지는 쪽이 금강산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옹은 3불을, 김동은 60불을 새겼는데 나옹은 윤곽도 또렷한 거룩한 상을 만들었으나 김동은 기법도 거칠었고 특히 60불중 네번째 부처는 왼쪽 귀를 새기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리하여 누가 보아도 김동은 졌고 그는 금강산을 떠나야 했다.

김동은 비로소 잘못을 뉘우치고 울소 깊은 못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뒤늦게 이 사실을 안 3형제도 울소에 뛰어들었는데 이때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고 이튿날 비가 그치면서 시체바위와 3형제바위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불교란 물질적.형식적 숭배보다 마음과 도덕의 수양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행간을 읽으면 장안사와 표훈사의 세력다툼이 심했음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삼불암 문바위를 기준으로 하여 만천골 아래쪽을 장안동, 위쪽을 표훈동이라 갈라 부르며, 문바위 벼랑 한쪽엔 '표훈동천 (表訓洞天)' , 다른쪽엔 '장안사 지경처 (地境處)' 라고 새겨 있으니 두 절의 경계선임과 동시에 두 절이 만만치 않게 다투었음을 명백히 알게 된다.

나는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며 '장안사 지경처' 를 넘어 표훈사로 향했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회는 '표훈사'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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