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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좌파'의 경제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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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라인강의 기적' '마르크 강국'으로 세계의 부러움을 사던 독일 경제가 '유럽의 병자'로 쇠락한 까닭은 무엇일까.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경제학 박사인 강원대 민경국 교수는 지난해 봄 한국하이에크 소사이어티 초청포럼에서 '독일 경제가 망하고 있다'는 제하의 독일 현지 연구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독일 경제의 쇠락은 천문학적 통일비용 부담 때문이 아니라 독일 경제의 내부요인 때문이라는 그의 분석은 지금도 경청할 만하다.

독일은 자타가 공인하는 노동자 천국이다.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노동비용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능력에 상관없이 노동조합이 정한 노임을 똑같이 받기 때문에 애써 잘해보려는 인센티브를 못 느낀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교육의 붕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노벨상의 45%는 독일인이, 자연과학 논문의 80%는 독일어로 쓰여졌다. 지금은 세계적인 과학자도 철학자도 경제학자도 드물다. 모든 대학이 하향 평준화됐기 때문이다. 교사와 교수는 정년을 보장받는 국가공무원이고 학교 간 차별성도 경쟁도 없다.

자동차.기계.전기.화학산업 등에서 독일의 전통적 우위는 사라졌고 정보통신과 생명공학 등 신산업분야는 미국에 30년 뒤진 상태다. 노동자의 경영참여와 기업이윤의 사회화로 기업인들은 모험심이 없고 의사결정도 보수적이다. 소득의 40%를 세금으로 걷어 노령사회의 고복지에 충당한다.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 등 모든 분야가 급격하게 좌경화된 데서 오는 사회적 업보다. 1968년 '68 문화혁명'으로 일컫는 독일 좌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득세 이후 평등주의와 결과적 정의 실험이 가져온 귀결이라고 한다.

독일 경제는 지금 과학기술력과 산업력의 과거 축적으로 버티고 있다. 좌파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마저 '불평등없는 사회는 개인의 소멸을 가져온다.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며 노동개혁과 교육개혁 쪽으로 돌아섰다. 최근 지멘스 노조는 주 35시간 근무를 고집하면 일자리의 절반을 헝가리로 넘기겠다고 회사 측이 위협하자 추가 임금없이 주 40시간 근무시간 연장에 동의했을 정도다.

한국 좌파들의 이념의 본향은 유럽이고 특히 개혁의 모델로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 안간힘이다. 한국이 68년이 아닌 21세기에 '늦깎이 좌파시대를 맞고 있다'는 영국 어느 한반도 연구가의 비아냥은 핵심을 찌른 말이다.

골드먼삭스가 예측한 2050년 새 경제질서는 '빅 6'(미국.일본.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와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4개국 대결로 압축하고 있다. 동북아의 중심이어야 할 한국은 실종상태다. 설비투자 활성화와 노동시장 유연화 등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10년 뒤 1인당 국민소득 1만2331달러의 남미형 국가로 전락한다는 지난해 한은 장기예측이 불안을 더한다.

시장경제는 물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투자와 생산 소비의 선순환 촉진으로 사회적 파이를 키워나가는 데 선진 시장경제 시스템보다 나은 대안은 없다. 기업에 대한 규제와 감시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고 주주의 본질적 권리를 침해하는 반기업적 개혁과제들은 과감히 접어야 한다. '유럽의 병자' 독일이 그 반면교사다. 중국이 한국보다 더 시장친화적이라는 얘기는 무얼 말하는가. 늦깎이 좌파들의 철지난 실험이 동북아 중심은커녕 '동북아 병자'로 만들 위험이 더 크다는 것을 개혁주체들이 깨달았으면 한다.

변상근 월간 NEXT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