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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의 서핑차이나] 중국의 ‘독서종자’ 장위안지(張元濟)와 상무인서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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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좋아, 책을 찾고, 책을 모으고, 책을 엮고, 책을 내고, 책을 쓰는데 일생을 바친 중국인이 있다.
그는 ‘중국 다섯 명의 제1호 인물(권력 서열 넘버 원)’인 광서제(光緖帝), 쑨중산(孫中山), 위안스카이(袁世凱), 장제스(蔣介石), 마오쩌둥(毛澤東)을 겪은 유일한 중국 제1호 출판인이었다.
“수백년 명문 세가 중 덕을 쌓지 않은 집안이 없지만, 그 중 제일 유익한 일은 바로 독서다(數百年舊家無非積德,第一件好事還是讀書).” 이 중국 출판계 원로가 말년에 직접 쓴 한 폭의 대련(對聯) 구절이다.
장위안지(張元濟,1867~1959)가 바로 주인공이다. 그는 1897년 상하이 인쇄공 넷이 만든 근대중국 최초의 출판사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을 중국 최고의 출판기업으로 만든 출판왕이다. 10년이 멀다 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던 개조환대(改朝換代)의 시대에 장위안지는 책을 지켰고, 상무인서관을 지켰고, 중국 문화를 지켜냈다.

중국인들은 기록에 강하다. 한자(漢字)의 힘이다. 그 뿌리에는 책에 죽고 책에 사는 ‘독서종자(讀書種子)’들이 있다. 지난 16일 중국신문출판총서의 발표에 따르면 2008년 전중국에서 발행된 도서, 잡지, 신문이 총량은 무려 2649억2600만 페이지, 종이 총량 613만톤에 이른다. 전년 대비 12.95% 증가했다. 그 가운데 도서는 27만5668종이다. 서적이 21만8667종, 교과서가 5만5853종, 화보류가 1148종이다. 출판 강국 중국 뒤엔 물론 왕성하게 책을 읽는 독자가 있다.

장위안지는 1892년 과거에 합격한 진사(進士)다. 외국과 교섭을 담당하던 총리각국사무아문에서 일했다. 1898년 광서제가 서양 신학문을 다룬 책을 찾았다. 신하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중국 어디에도 책다운 책이 없었다. 이 때 장위안지가 나섰다. 서양 관련 책들을 구해 황제에게 바쳤다. 대부분 장위안지가 소장한 책들이었다. 황제는 책에 찍힌 주인의 인장을 유심히 봐두었다. 무술변법이 일어나고 5일째, 광서제가 장위안지를 불렀다. 그는 신식학당 건립과 인재 배양, 번역의 중요성을 황제에게 역설했다.
그러나 무술변법은 실패했다. 장위안지도 벼슬을 잃었다. 그를 유심히 봐두었던 이홍장은 자신의 최대 스폰서인 관상(官商) 성선회(盛宣懷)에게 장을 추천했다. 성선회는 장을 불러 자신이 상하이에 세운 남양공학(南洋公學, 상하이 자오퉁(交通)대학의 전신) 역서원(譯書院) 원장에 앉힌다. 후에 교장이 됐다. 1902년 장은 교장직을 떠난다. 출판업에 뛰어들기 위해서다. 이름부터 일개 상업 인쇄소에 불과했던 상무인서관을 출판사로 탈바꿈시킨다. “교육 발전이 평생의 꿈이기에, 책의 숲을 향해 노력해 왔다. 이것이 농사를 잘 지을 비옥한 논밭이니, 가을이 오면 믿을만한 인재들을 수확할 것이다(昌明敎育平生願,故向書林努力來,此是良田好耕植,有秋收獲仗群才)” 그가 교단을 떠나며 읊은 시다. 인재 양성을 위해 학교에서 출판으로 업을 바꿀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상무인서관에 자리를 잡은 그는 1909년 함분루(涵芬樓)라는 부설 도서관을 만든다. 이후 동방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꿔 고래로 전해내려오는 희귀 도서 판본들을 사방팔방에서 사 모았다. 이와 더불어 고적 편찬에도 힘썼다. 중국의 역대 고전을 총망라한 ‘사부총간(四部叢刊)’을 1922년부터 36년까지 477종 3134책을 펴냈다. 송원(宋元)시대의 우수한 역대 정사 판본을 여러 종 모아 ‘백납본(百納本, 한 종류의 서적을 만드는데 사용된 판본이 여러 종류일 때 부른 말) 이십사사(二十四史)’를 펴냈다. 사전과 교과서는 상무인서관의 전공이자 주수익원이었다.
상무인서관은 두 차례 위기를 겪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침략의 야수를 뻗치던 일본군이 32년 전투기로 동원 상하이 상무인서관 인쇄공장을 폭격하고 무뢰배를 사주해 동방도서관을 침입해 불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상무인서관 자산의 80%가 잿더미로 변했다. 동방도서관 장서 46만 권이 불에 탔다. 진품 고서적 3700종 3만5000여 책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졌다.
하늘로 날아가는 고서들의 잿더미를 보며 그는 “내가 이 책들을 애써 한 곳에 모으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을텐데”라며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자책했다.
상무인서관은 당시 국공양당의 치열한 쟁탈 대상이었다. 국민당 요인 리쭝런(李宗仁)은 1949년1월 특사를 장위안지에게 보내 국민정부를 대표해 베이핑(北平, 베이징의 당시 이름)으로 가 공산당과 담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팔순이 넘은 나이를 이유로 거절했다. 같은해 8월 이번엔 공산당이 그에게 베이핑으로 올라와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고심끝에 승락했다.
그 배경에 상무인서관에 찾아온 두번째 위기가 있다. 상무인서관은 전통적으로 상하이 노동운동의 총본산이었다. 중국 공산당 혁명원로 천윈(陳雲)이 상무인서관 노조간부 출신이다. 노동운동에 대해 비둘기파였던 장위안지는 1948년 말부터 심각해진 경영 위기 타개를 위해 공산당을 선택했다. 49년 3월이 되자 감원, 감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82세의 장위안지는 6월초 중국공산당 상하이 초대 시장 천이(陳毅)의 예방을 받았다. 7월 결국 정부에 재정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지난 50여년동안 문화교육에 공로가 컸으니 직원 월급조차 주기 어려운 현상황 타개에 공산당이 도와주길 요청한 것이다. 9월 그는 정협 참석을 위해 베이핑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오쩌둥 두 차례, 주더(朱德)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수차례 만났다. 수많은 문화계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장위안지는 상무인서관을 공사합영(公私合營)회사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상무인서관 살리기에 일로매진하던 장위안지는 12월25일 공회(工會)성립대회에서 연설 도중 혼절해 쓰러진다. 좌반신이 마비됐다. 1953년 그는 상하이문사관(上海文史館) 관장에 지명된다. 그는 거절하려 했지만 마오가 그를 직접 임명했음을 전해 듣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54년 상무인서관은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옮겨갔다. 고등교육출판사와 합병됐다. 공사합영이 실행됐다. 그 소식을 장의 오랜 친구 천수퉁(陳叔通)은 편지로 이렇게 전했다. “상무인서관이 공상합영 된 것은 순리라 볼 수 있네. 이로서 57년 이어온 사업이 문닫지 않게 됐군. 허나 실상을 보면 이제 끝난 것 아니겠나.”
장위안지는 그 해 제1회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에 당선됐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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