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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정치] 금배지, 달기도 어렵지만 떼기도 어렵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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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국 정치사에서 의원직 총사퇴 결의는 몇 차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1979년 박정희 정권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제명하자 신민당·통일당 의원 69명이 집단 사퇴서를 제출한 일입니다. 그러나 얼마 뒤 10·26 사태가 발발하자 공화당과 유정회는 본회의에서 야당의원 사퇴서를 모두 반려했습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거대 여당 민자당이 국회에서 쟁점 법안을 무더기로 강행처리하자 평민당·민주당·무소속 의원 80명이 사퇴서를 제출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두 달 뒤 박준규 국회의장이 모두 반려했지요. 재미있는 것은 당시 쟁점법안 가운데엔 민영방송(지금의 SBS)을 허용하는 ‘방송관계법’이 들어 있었고 그때도 MBC 노조가 정부의 ‘방송장악’ 음모라며 파업을 벌였다는 점입니다.

한나라당도 의원직 총사퇴를 결정한 적이 있습니다. 정권교체 직후인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사정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었을 때지요. 그때 이회창 총재는 “독재권력의 등장을 막아야 한다”며 총사퇴의 변을 내놨고, 안상수 대변인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비장한 결의를 했다”고 밝혔습니다. 요즘 어디서 많이 듣는 말 아닌가요? 하지만 한나라당은 실제로 사퇴서를 제출하진 않았답니다.

열린우리당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직후 총사퇴를 발표했습니다. 여당으로선 처음 있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열흘 만에 당시 김근태 원내대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을 덮을 수 없다”며 대국민 사과를 하고 사퇴 의사를 철회했습니다. 한나라당은 “총사퇴 하면 총선 때 국고보조금이 확 주니 그런 것 아니냐”고 비난했지요.

의원직 총사퇴가 항상 공수표였던 것은 아닙니다. 1965년 한일협정 비준안 저지를 위해 야당인 민중당 의원 8명이 의원직을 던진 일이 있습니다. 그때는 지역구 의원도 탈당만 하면 의원직이 자동 상실돼 사퇴가 쉬웠다고 하는군요. 지금은 지역구 의원이 사퇴하려면 회기 중엔 본회의 의결을, 비회기 중엔 국회의장의 재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벼랑에서 떨어지기 어렵게 만드는 안전벨트가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벼랑끝 전술’이 나온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어차피 사퇴가 안 될 줄 알고 펴는 정치공세란 시각입니다.

이미 김형오 국회의장은 민주당 의원들의 사퇴서를 처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민주당은 여러 가지 딜레마를 안게 됩니다. 우선 꼬박꼬박 나오는 세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세비엔 반납 절차가 없습니다. 정세균 대표 등 몇 명은 세비계좌 자체를 없애겠다고 했지만 나머지 의원들은 어정쩡한 입장입니다. 의원실마다 6~8명씩 되는 보좌진·인턴의 급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받는다면 ‘위장사퇴’란 비판을 받게 되고, 수령을 거부하자니 생계가 딱합니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탈당만 하면 동시에 의원직을 상실하는데 구태여 당 지도부에 사퇴서를 맡겼다는 것도 어색합니다. 사퇴 회견을 한 최문순(비례대표) 의원도 당에서 탈당계를 처리해줘야 진짜로 사퇴하는 것인데 아직 당의 결정은 엉거주춤한 상태입니다. 달기도 어려운 금배지지만 떼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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