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엘크 닮아가는 한국 정치인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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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34면

아일랜드엘크를 아십니까. 1만1000년 전 멸종한 사슴의 일종입니다. 그들의 거대한 뿔을 능가하는 장식품을 가진 동물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합니다. 수컷의 뿔 전체 길이는 최고 12피트(약 3.66m), 무게는 40㎏이나 됐습니다. 빙하기 말기에 산 그들의 화석은 유럽 대륙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귀족과 부호들의 실내 장식품으로는 최고로 각광받았습니다. 생물학자 제임스 파킨슨은 1811년 “대영 제국의 어떤 화석도 아일랜드엘크의 것보다 더 큰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썼습니다(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참조).

이양수 칼럼

그런데 그들은 왜 거대하고 현란한 뿔을 갖게 됐을까요.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무기라는 설입니다. 다른 하나는 암컷을 유혹하는 과시 장치라는 것입니다. 찰스 다윈을 추종하는 진화론자들은 포식자와의 전투보다 암컷과의 짝짓기용이라고 설명합니다. 더 많은 자식을 남기려는 성적(性的) 무기라는 거죠. 하지만 거대한 뿔은 멸종을 부른 화근이 됩니다.

아일랜드엘크의 화석 사진을 보면서 문득 한국 정치를 떠올립니다. 국익과 민생이라는 몸통을 무시한 채 이념과 투쟁이라는 화려한 장식으로 민심을 유혹하려는 행태가 닮았기 때문입니다. 선명성 구호는 아일랜드엘크의 뿔처럼 커지고 있습니다. 표(票)와 권력은 ‘여의도 정치인’들을 유혹하는 최고의 페로몬입니다. ‘선거를 위해서라면 부모·형제와도 등을 돌린다’는 게 정치권의 속설입니다.

그러다 보니 무대 위는 어느덧 싸움꾼, 선동꾼으로 득실거립니다. 4선(選) 의원인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당권을 잡기 전만 해도 ‘여의도 신사(紳士)’로 통했습니다. 기업 경영인 출신의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 때문에 적도 친구처럼 대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정 대표는 ‘미디어법’을 핑계로 단식 투쟁, 국회 표결 봉쇄, 의원직 사퇴에 이어 장외 투쟁까지 나섰습니다. ‘언론악법 원천무효’를 구호로 해서 말이죠. 정 대표의 선택은 과연 맞을까요. 그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요.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사석에서 “보수 언론이 방송까지 갖게 되면 민주당의 재집권은 영영 불가능해진다. 죽든 살든 여기서 결판낼 수밖에 없다”고 말하더군요. 미디어 통합이라는 시대 조류보다 2012년 대선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방송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송시장 개방을 뜻하는 미디어법이 악법이라면 노태우 정권 시절 신문시장이 개방된 이후 ‘언론 자유가 만개했다’는 국내외 평가는 잘못된 것일까요. 그것이 언론 탄압이라면 방송계는 왜 가만히 있었나요. 방송시장 개방 역시 그때처럼 국민의 TV 채널 선택권을 넓혀 주지 않을까요. ‘밥그릇’을 지키려는 방송계 인사들이 ‘언론 자유’ 운운하는 걸 보면 차라리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대한민국 호(號)는 지금 망망대해에서 제자리를 뱅뱅 도는 유랑선과 같습니다. 김영삼 정권 말기에 시작된 경제위기는 현재진행형입니다. 한국의 경제력, 즉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2002년 11위까지 올라갔다가 지난해 15위로 떨어졌습니다. 1인당 소득은 2만 달러 앞에서 ‘시시포스 신화’처럼 번번이 미끄럼질하고 있습니다. 외부 환경도 갑갑합니다. 김정일 유고 가능성, 지구온난화, 주변 4강의 세력 판도 변화라는 먹구름이 잔뜩 깔려 있습니다. 투쟁과 분열의 DNA로는 헤쳐 나갈 수 없는 위기 국면입니다. 쌍용차 사태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발등의 불조차 끄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죠.

해법은 없을까요. 아일랜드엘크처럼 멸종되지 않도록 뿔 크기를 줄여 나갈 묘안 말입니다. 서구 학자들은 미래 정치가 각계각층의 복잡한 욕구와 이익을 반영하는 다당제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양당제로는 격렬한 권력 다툼과 포퓰리즘,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치유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얼마 전 ‘강희대제(康熙大帝)’라는 중국 TV 드라마를 보다 무릎을 친 적이 있습니다. 35명이나 되는 왕자의 후계 싸움이 궁정 반란 수준으로 치닫자 강희제는 둘째 아들(첫 번째 왕세자)을 책망하면서 “제왕은 모름지기 치국평천하 이전에 수신제가를 해야 하거늘 너는 정구(靜口·입을 다스림)마저 제대로 못 했다”고 질타합니다. 61년간 중국 대륙을 호령한 만주족 황제에게도 자신의 입을 다스리는 게 쉽지 않았음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기에 중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라는 평가를 받겠지요.

어떻습니까. 투쟁과 분열의 두 뿔을 ‘정구’라는 한방(漢方)으로 다스려 보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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