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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伏에 허기진 까닭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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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34면

초복·중복·말복 등 삼복(三伏)은 예부터 연중 가장 무더운 때다. 복날, 한여름 무더위를 이기고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사람들은 영양식을 먹는 게 일반적이다. 직업이 정치인인 만큼 삼복기간 중 이런저런 일정이 무척 많은 편인데 복날 식사로는 개고기, 닭고기로 만든 보양식이 빠짐없이 제공된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처럼 내 경우 복날은 먹을 음식이 마땅찮은 고통스러운 날이다. 개고기는 아예 입에도 대지 못하고 닭고기도 즐기지 않으니 결국 참석자들이 권하는 소주나 오이·당근으로 보양식을 대신할 때가 허다하다.

필자가 보신탕을 먹지 않는 것은 어린 시절 추억 때문이다. 초등학교 2~3학년 때 집에서 포인터 한 마리를 기른 적이 있다. 그 당시는 순종이라 믿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잡종이 아닐까 싶다. 그 녀석은 아침에 300m쯤 떨어진 학교까지 나를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올 땐 학교까지 마중나와 함께 집에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데 이 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잰걸음으로 집에 와 보니 녀석이 화장실을 차지하고선 으르렁대고 있었다. 알고 보니 녀석은 나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트럭에 치여 오른쪽 앞다리를 크게 다쳤던 것이다. 뼈가 부러진 심한 고통에 매우 흥분한 상태라 부모님과 옆집 어른들도 쳐다만 볼 뿐 어찌하지 못했다.

놀란 필자가 녀석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자 그제야 눈물을 흘리며 세 다리로 끙끙대며 화장실에서 뛰쳐나오는 것이었다. 당시엔 동물병원은커녕 사람 병원도 변변치 않은 시절이었다. 급한 대로 인근 약방에서 사람이 뼈를 다쳤을 때 바르는 갑오징어가루를 사다 다리에 바르고 붕대로 감아주는 등 정성을 다해 녀석을 돌봐주었다. 열흘 정도 지나자 녀석은 다행히 고통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 보니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님은 개를 잘 기를 집에 주었으니 그런 줄 알라고만 말씀하셨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아버님께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개장수에게 파시지 않았나 싶다. 세 다리로 절룩거리며 다니는 어쩌면 흉물스러운 모습이 편치 않아 보였을 법하다. 울며불며 떼를 써봐도 어찌할 수 없었던 필자는 친구를 잃은 슬픔에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뼈가 부러진 고통에도 주인을 믿고 의지했던 녀석의 가상한 충성스러운 마음을 잊지 못해 필자는 4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보신탕에 입을 대지 않는다.

닭고기에 대해서도 아픈(?) 기억이 있다.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에 통닭은 매우 귀한 음식이었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 사다 주신 인근에서 제일 유명한 통닭집의 통닭을 먹게 되었다. 너무 맛있게 먹다 닭뼈가 목에 걸리고 말았다. 날카롭게 쪼개진 닭뼈가 목에 걸렸으니 얼마나 아팠겠나. 솔직히 누가 어떻게 닭뼈를 뽑아냈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니, 거의 죽다 살아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날 이후 살코기만 있는 가슴살과 닭다리 살 정도나 먹을까 지금도 닭뼈에 붙은 고기는 먹지 않는다. 이렇듯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유년 시절의 경험과 추억은 평생 가는 셈이다.

어쨌든 삼복 기간은 내겐 제대로 허기를 채우기 힘든 풍요 속의 빈곤 기간이다. 그런데 지난해 중복 점심 자리에서 모처럼 영양식을 즐길 수 있었다. 바로 민어탕이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삼복더위에 영양식으로 민어탕을 먹었다고 한다. 특히 한양에서 민어찜은 일품(一品), 도미찜은 이품(二品), 보신탕은 삼품(三品)이라 했다고 하니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였다. 음식을 가리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주위에는 필자 같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들을 배려해 복날 음식을 장만할 때 어죽이나 고기·야채 요리 같은 보다 다양한 상차림이 있으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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