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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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때마침 채소가게 앞을 어구를 메고 지나가던 어부 두 사람이 길 한가운데 서서 소주를 병째 들이마시고 서 있는 묵호댁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나팔 불 듯 소주 한병을 단숨에 들이켠 묵호댁은 빈 병을 든 채 방파제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파제를 겨냥하고 걷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방파제를 거니는 산책객들을 겨냥해서 밤에만 휘장을 치고 좌판을 벌이는 선착장 초입의 포장마차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언저리에 들어앉은 포장마차의 주인들은 한결같이 낯선 젊은 부부들이었다.

포장마차 안은 썰렁했다.

혼자 들어서는 묵호댁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워낙 경기가 없었던 터라, 주문하는 대로 소주 한 병과 멍게 한 접시를 내주고 귀에 끼고 있는 이어폰의 음

악에만 열중해 있었다.

묵호댁은 두 젊은이들은 거들떠보는 법도 없이 술에 게걸들린 여자처럼 소주잔을 연거푸 비워댔다.

한동안이 지난 뒤에야 묵호댁의 거동에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한 젊은이가 볼멘소리로 묵호댁을 제지했다.

"아줌마. 소주를 물마시듯 마시는 게 아닙니다. 불만이 많으신가 본데, 그러면 안돼죠. " 개운찮은 묵호댁의 시선이 다독거리는 어투인 젊은이의 외양을 가파른 눈길로 훑었다.

"그래, 불만 많다 왜? 내가 횟집 주방장인데 내한테 칼부림 한 번 당해 볼래?" "입도 어지간히 험악하네요? 어느 횟집 주방에 있는데 입이 그렇게 험해요?" "어느 집 식당인지 모르겠다만 주방생활 십년에 벌어놓은 돈은 좆도 없고, 늘어난 것은 육담이고,가슴속에 가득하게 채운 것은 숯검정같이 시꺼먼 포한뿐이네. 이봐. 손님도 없는데 나하고 한잔 할래?" "우리가 술 마시면 장사를 포기해야 해요. "

"다른 포장마차도 모조리 비어 있던데, 엄살 떨고 있네. " "술 마시러온 게 아니고 시비 걸러 온 아줌마 같아요. " "그런 소리들 말어. 오늘 같은 날 내 시비를 받아줄 사람 있다면, 술을 섬으로 사겠다. "

남편의 등뒤에 숨어서 해죽해죽 웃고 있던 젊은 아내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남상지른 얼굴에 주기가 있어 보이는 묵호댁의 걸찍한 상말에 질려버린 것이 분명했다.

젊은이들을 상대로 주사깨나 부릴 것 같았던 묵호댁은 그러나 포장마차의 휘장을 들치고 밖으로 나섰다.

문득 바다에 몸이라도 던져버리고 싶은 자포자기가 가슴 속을 할퀴고 지났다.

자기가 어째서 봉환이라는 나락 속으로 대책없이 빠져들고 말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부터 파도가 밀려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휘청거리는 자신의 몸뚱이를 빤히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역시 휘청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방파제 끝까지 걸어와 있었다.

그러자 바다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었던 충동이 이상하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방파제를 걸어온 것은 분명 자살을 위해서였다는 예비되지도 않았던 생각이 굳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으로 서서 시꺼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일가친척이 많지 않다는 것이 그순간 홀가분했다.

그녀는 미끄러지려는 발을 조심하면서 바윗돌을 밟고 방파제 아래로 거침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뒷덜미를 가로채서 패대기치며 뱉어내는 봉환의 목소리가 걸찍했다.

"이런 씨발. 디질라카면, 내 없는 데서 디질 일이제. 어느 놈의 신세를 망칠락꼬 여기서 이 지랄 벌이고 있노? 아이고 내 팔자야. "

방파제로 끌려나오면서 눈을 멀건히 뜨고 바라보자니, 별빛이 총총한 하늘을 배경으로 선착장에 정박한 오징어 채낚기 어선들의 불빛들이 희끗희끗 스쳐가고 있었고, 물에 젖은 봉환의 얼굴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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