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배치.재취업 200여만명 새 직장 적응에 전전긍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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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퇴출은행 출신으로 A은행에 흡수된 金모 (36) 씨는 요즘 급격히 달라진 업무처리 방식에 무척 당혹스럽다.

전 직장에서는 일은 급한데 직속상관이 없으면 바로 지점장에 대한 구두보고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했으나, 지금은 반드시 직속상관을 거치도록 돼있기 때문. 金씨는 "많은 변화를 예상하긴 했지만 직장 분위기와 업무방식 차가 너무 커 무척 힘들다" 고 털어놓았다.

S사에 있다가 중견업체로 옮긴 C씨도 "어려운 때 일자리를 구한 것은 다행이지만 전 직장과 지금 직장간 기업문화 차이 때문에 업무 효율성에도 문제가 있다" 고 말했다.

IMF 체제 이후 은행.기업의 잇따른 사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업자 못지않게 재배치.재취업으로 인한 전직 (轉職) 이 급증하면서 직장내 '문화적 갈등' 이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속에서도 '전직 문화' 가 형성되면서 직장인들이 스스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자기계발에 힘쓰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 2백만명에 이르는 전직자 = 노동부의 경력직 노동력 이동현황 (고용보험 가입업체 기준) 을 보면 올 상반기중 총 52만명이 직장을 옮긴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노동부가 관련 통계 조사를 시작한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의 숫자보다 무려 75.2%가 늘어난 것이다.

올 7월 한달에도 8만7천2백69명이 자리를 옮겨 전년동기보다 53.9%의 증가율을 보였다.

그나마 이는 고용보험에 가입한 전국 22만개 사업장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실제 전직자수는 2백여만명을 웃돌면서 (LG경제연구소 추산)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10%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히 5대 그룹의 구조조정에 따라 반도체.석유화학.항공기.정유부문 등에서 '전직' 할 대상만도 14개 업체에서 3만4천3백여명에 이르고 있으며, 앞으로 2, 3차 작업을 거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 전직에 따른 갈등 = 지난 5월 대우자동차에 인수된 쌍용자동차 출신 李모 (37) 대리는 요즘 바짝 긴장하고 있다.

현 직장으로 옮긴 뒤 한숨 돌리는가 싶더니 최근 여기서도 감원바람이 분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 사원들보다 외부에서 흡수된 사람들이 우선 구조조정 대상이 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다" 고 말했다.

전직자들은 이밖에도 낯선 동료직원.상사와의 사소한 언쟁이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병적일 정도로 몸가짐을 챙기는 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대우자동차 李대리는 "전 직장에서 말년차 대리로 사내 진급시험까지 합격해 이미 과장이 돼있을 처지지만 이곳에서는 진급얘기는 말도 못 꺼내고 있다" 고 말했다.

◇ 활발해지는 자기계발 = 신원그룹에서 퇴직, 부가통신 광고대행사인 S사로 옮긴 조성제 과장은 "바뀐 직장의 새로운 틀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존 사원보다 더 긴장하고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 10분이라도 더 일찍 출근하려고 노력한다" 고 털어놓았다.

지난달 국내 대기업에서 퇴진 압력을 받고 외국계 B화학회사로 옮긴 金모씨는 "전 직장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전공서적들을 지하철에까지 들고다니며 읽고 있다" 고 말했다.

그는 또 함께 전직한 동료들도 하나같이 토익.공인중개사 시험공부는 물론 무역강좌를 수강하는 등 전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전직자 중에는 '새로운 환경을 견뎌내려면 건강이 중요하다' 며 새벽 일찍 헬스클럽을 다니는 등 건강 유지에 힘을 쏟는 사례도 늘고 있다.

◇ 전문가 의견 = 전문가들은 전직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앞으로 한국도 미국 등 선진국처럼 고용조정이 더 일반화될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실력을 쌓고, 새 직장에 잘 적응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 김성식 (金聖植) 연구위원은 "은행 등 일부 인수.합병 (M&A) 된 업체의 사례를 볼 때 장기적으론 기존 직원과 신규 직원들간 견제와 파벌조성이 가장 큰 문제" 라며 "경영자들이 회사 안에 화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노력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고 지적했다.

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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