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성추문과 경제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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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의 보수파에게 빌 클린턴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가난한 아칸소 출신인 그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준 것은 동부 엘리트 집단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베트남전쟁 때 반전 (反戰) 운동으로 청춘을 보낸 베이비붐 세대가 백악관에 입성한 것에 보수적인 구세대는 크게 좌절했다.

레이건시대에 틀을 잡은 부유층 위주의 경제.사회제도에 광범위한 개혁의 칼을 들이대는 클린턴을 보고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파는 위기감을 느꼈다.

법을 지배하면 정치를 지배한다는 미국에서 클린턴은 대법원판사.법무장관.연방수사국 (FBI) 국장 등 사법기관의 요직에 여성.흑인.자유주의자들을 임명해 보수진영을 위협했다.

소련 붕괴로 보수층이 외부의 적을 잃고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들에게 클린턴이라는 '정치적인 꼬마' 는 제발로 찾아든 적당한 내부의 적이었다.

보수층은 의회에서 중산층 이하를 위한 의료보험 등의 개혁에 제동을 걸면서 클린턴의 여성편력을 추적했다.

그래도 클린턴은 자제할 줄 모르고 보수파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성적 쾌락에 탐닉했다.

공공 (公共) 의 자산인 근무시간에,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하는 대통령 집무실과 서재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는 경호원들을 필요 이상 긴장시키면서 사랑놀이에 열중하면서 건전한 상식을 모욕했다.

그러고도 정치적으로 살아남기를 바란다니 미국다운 일이다.

클린턴은 미국경제를 불황에서 회생시켜 국정운영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여론의 대세는 정치를 그 정도로 잘하면 사생활이 좀 어지러워도 섹스 스캔들 때문에 탄핵을 당하거나 사임할 것까지는 없다는 데로 기울었다.

특별검사의 보고서는 대통령의 도덕적인 권위와 정직성.인격을 파괴하는 내용으로 가득해 미국인들의 클린턴 비판이 고조되고 있지만 대통령 자리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대세는 유지될 것 같다.

아시아.중남미.러시아의 경제위기가 세계적인 불황이나, 심지어 1929년 같

은 대공황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는 지금 주요 국가들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미국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 영향에 세계인들이 불안한 것은 글로벌시대의 어쩔 수 없는 한 단면이다.

한국의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는 클린턴 행정부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다.

가뜩이나 취약한 우리 경제가 미국 대통령의 교체를 견뎌낼지 의문이다.

북한문제도 94년 제네바 북.미합의를 기본틀로 북한을 대화의 채널에 묶어두고 있는 현실에서는 클린턴의 건재가 최선이다.

그러나 하원의원과 전화하면서도 성행위를 즐긴 것이 탄로난 대통령의 발언권이 그전 같을 수 있을까. 공화당도 클린턴이 물러나 앨 고어가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는 만신창이가 된 클린턴이 임기를 채우는 것이 2000년 대선 (大選)에 유리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도덕적인 동물' 의 저자 로버트 라이트는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카오스 이론을 비판하면서 브라질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면 텍사스에 폭풍이 일어나듯 백악관 여직원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속눈썹 한번 깜박거린 것이 세계적인 경제불황을 일으키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라이트에 의하면 나비가 날갯짓을 한 뒤 다른 많은 요소들이 가세해야 비로소 폭풍이 일어난다.

르윈스키의 성적 매력만 가지고는 클린턴이 몰락의 위기에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보수파의 복수심, 11월 중간선거, 2000년 대선전략, 클린턴의 도덕 불감증 등 많은 것들이 끼어들었다.

같은 이치로 세계경제가 더 어려워져도 그 책임을 르윈스키 사건에만 뒤집어씌울 수는 없다.

한국을 두고 말하자면 우리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고, 정부가 올바른 비전과 전략을 갖고 정책을 잘 편다면 르윈스키가 클린턴의 품안에서 속눈썹을 백번 깜박거려도 그것 때문에 한국경제가 더 타격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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