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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경제포럼]빅딜과 정부의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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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른바 '빅딜 (대기업간 사업교환)' 로 대표되는 대기업 구조조정을 놓고 정부의 산업정책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논의의 핵심은 정부가 기업의 구조조정에 개입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한 쪽에서는 "정부가 기업더러 구조조정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나" 라는 의문을 제기하느가 하면 다른 한 쪽에선 "시장자율에 맡겼는데 부실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하지 않아도, 정부가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라며 반론을 펴고 있다.

양쪽의 주장을 들어본다.

[사회=김정수 본사 전문위원.경제학박사

대담=이영세 산업연구원 정책연구센터장,유승민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김정수 = 5대 그룹이 최근 발표한 구조조정 합의안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영세 = 빅딜은 필요하다고 본다.

과잉투자 상태에서는 경쟁력있는 한 업체에 사업을 몰아줌으로써 그 산업 전체가 살아날 수 있다.

최근 빅딜에 대해 비판이 많다.

우선 공동회사 형태로는 결합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공동회사는 경영권이나 지분문제로 오히려 경쟁력강화가 제약될 수 있다.

게다가 부실기업끼리의 공동회사 설립은 경쟁력 강화와도 관계없고 재무구조개선 효과도 미미하다.

또 자구노력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과다한 정부지원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특혜를 달라는 것이다.

기업들은 출자전환 등이 특혜가 아니라고 하지만 은행 입장에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므로 특혜의 소지가 있다.

물론 세제지원은 구조조정의 장애를 없앤다는 차원에서 바람직하지만, 과다한 금융지원은 특혜시비 및 통상마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유승민 = 과잉중복투자 문제는 빅딜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과잉중복투자는 기업지배구조의 실패.금융의 실패.대마불사 (大馬不死) 론에 따른 도덕적 해이 등 3가지 원인에 의한 것이다.

이에 대한 개선 없이 빅딜을 통해 과잉중복투자를 일거에 해소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금융개혁.지배구조 선진화.퇴출구조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

빅딜을 정부가 주도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발상이다.

기업의 경쟁력은 계획경제식으로 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또 정부가 주도하면 오히려 대기업이 정부지원을 얻는 통로로 이용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빅딜이 정말 돈이 된다고 판단하면 가만둬도 스스로 할 것이다.

억지로 몰고 가다가는 나중에 엄청난 시비가 일어난다.

이번에 발표된 내용이 빅딜이 아니라 공동출자의 형식을 취한 것은 나중에 원위치로 돌아가기 위한 사전포석이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외국에선 정부주도의 빅딜을 시장원리에 어긋난다고 보고 있다.

이때문에 투자자의 신뢰감도 떨어지고 통상마찰의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김 = 정부가 재벌의 규모에 따라 획일적인 구조조정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란 시각이 많다.

그런데도 정치권에서는 빅딜이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 것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느낌이다.

▶이 = 정상적인 시기라면 정부가 시장자율성을 높이고 공정한 룰을 정착시키면 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과거부터 쌓여온 문제가 많아 이를 설겆이해야 하는 입장이다.

물론 이를 기업이 자율적으로 해결하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지금은 시장경제가 작동하지 않고 게임의 룰도 정착돼있지 않아 아무도 먼저 나서지를 않는다.

또 과거의 여러 잘못이 계속 관성을 유지해가고 있다.

이를 깨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시장의 자율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정부개입은 불가피하다.

또 지금의 문제들이 정부의 실패에 의한 결과라면 결자해지 (結者解之) 의 차원에서도 개입이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정부는 구조조정의 여건을 마련해주고 외압을 주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김 = 정부가 힘이 빠질 때쯤 돼서 '내 회사를 돌려달라' 는 소송은 안 일어나겠는가.

▶이 = 과거 5공때처럼 법적 절차를 무시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김 = 지금은 법적 절차를 따르고 있다고 보나.

▶이 = 적어도 기업의 합의에 의한 모양은 갖췄다.

소액주주가 승복할 수 있는 쪽으로 절차를 잘 밟아 나간다면 법적으로 문제삼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김 = 외국에서 독과점을 지적하며 불공정거래에 대한 시비를 걸어올 소지는 없나.

▶유 = 미국에서도 대형합병이 일어나고 이를 허용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효율성이 높아지는 효과와 경쟁을 제한하는 부작용에 대한 토론과정을 반드시 거치고 다른 길이 없는가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과정없이 넘어가면 외국의 경쟁당국으로부터 이의제기를 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이 작업이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다.

▶이 = 선진국이 문제삼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미국의 유사사례를 찾아 대항논리를 마련해야 한다.

▶김 = 빅딜을 포함해 정부의 기업구조조정 정책을 어떻게 바꿔야 하나.

▶유 = 경기변동 때문에 생기는 공급과잉을 이유로 무조건 없애고 줄이면 미래의 산업기반이 축소될 우려가 있다.

기업이 합리적 투자결정을 하도록 인센티브의 왜곡을 시정해야 한다, 더불어 지금은 부실기업이 제 때에 망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입을 터주면서 퇴출이 비효율적이면 당연히 '혼잡비용' 이 생길수 밖에 없다.

빅딜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김 = 요즘같은 경제력집중억제 정책은 별 의미가 없는듯 하다.

정부는 불공정거래에 대해서는 엄하게 다루고, 대신 누가 얼마나 많이 갖느냐 (경제력집중) 는 시장에 맡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지금은 기업들이 과거보다 더 정부의 눈치를 본다.

정부가 방향을 정하고 이끌어 가기 때문에 관치경제가 더 심해진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금은 자발적인 구조조정이 안 일어나니까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도 하지만, 그렇다면 구조조정이 마무리된 이후 기업.정부간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설정돼야 하는가.

▶유 = 구조조정을 정부가 아무리 몰아가려 해도 이익에 안 맞으면 기업은 어떤 식으로든 피한다.

이것이 기업의 생리다.

주식부채전환 (출자전환) 을 예로 들어보자. 정부는 이를 통해 기업주의 경영권을 빼앗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어느 기업이 따를 것인가.

또 정부가 다 경영할 능력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은행이 상당부분 국유화되고 있으므로 대규모 출자전환이 이뤄지면 기업도 사실상 국유화되는 셈이다.

이것이 관치경제의 부활이다.정부가 구조조정을 마무리 지은후 손을 딱 뗄 수 있겠는가.관료의 속성상 그렇게 못할 것이다.시장이 완전히 죽을 우려가 있다.

▶이 = 대기업정책은 전환점을 맞았다.

정부는 과거의 문제점을 한꺼번에 몰아 설겆이를 해야 하는 입장이다.

또 앞으로 시장경제를 작동시키는 일도 동시에 맡고 있다.

이때문에 정부의 역할범위에 대해 혼란이 있을 수 있다.

빅딜이나 워크아웃은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일단 시스템이 돌아가면 기업경영에 대한 감시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출자전환도 기업의 경영권을 빼앗기보다 은행의 기업감시기능을 강화하는 쪽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과거처럼 기업의 잘못된 판단에 따른 과잉중복투자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스템을 아예 룰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그 룰이 제대로 지켜지도록 만들어 놓고 손을 떼야 한다.

룰이 지켜지면 시장원리도 작동되므로 정부가 구태여 간섭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정리 =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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