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국내은행들에 360억 달러 빌려주고 못받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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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한국은행이 외환보유고를 국내은행들에 예탁금 형태로 빌려줬다가 못받고 있는 돈이 8월말 현재 3백60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외환위기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10월말 기준으로도 2백34억달러가 은행에 물려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게다가 지난해말 외환위기에 몰리자 한국은행은 은행의 외환 부도를 막기 위해 2백33억달러를 더 지원했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외환보유고를 현금이나 미국 재무부증권 (TB) 등 곧바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파행적인 외환보유고 운용이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중 하나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게 됐다.

더욱이 이 돈은 외화예탁금 (21면 용어한마디 참조) 형태로 은행에 지원했기 때문에 담보를 받아놓지 않았다.

은행이 파산할 경우 떼일 수밖에 없게 돼있는 셈이다.

지난 85년 1억6천만달러에 불과했던 한은의 외화예탁금은 86년 이후 급격히 늘었다.

특히 국제수지 흑자가 크게 불어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큰 폭으로 증가했다.

92년부터 경기가 가라앉자 92~95년 사이에는 1백37억9천만달러를 은행에 지원, 외화대출 형태로 기업에 빌려주는 부양책으로 활용키도 했다.

한 시중은행 간부는 "90년대 초반 외화대출은 한은이 대준 돈으로 대출해주는 정책금융이었기 때문에 먼저 차지하는게 임자였다" 며 "이를 많이 배정받기 위해 로비가 치열했다" 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풀린 외화대출은 대기업들의 과잉.중복 투자를 초래한 기폭제가 됐고 결국 대부분 외화대출이 부실화돼 은행들은 기업에 준 외화대출금을 회수하기 어렵게 됐다.

대기업들의 과잉.중복 투자가 외환위기를 불러온 주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그 뒷돈은 외환당국이 대준 셈이다.

이로 인해 한국은행도 은행에 준 외화예탁금을 회수할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은행의 국제결제은행 (BIS) 자기자본비율을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이 돼 은행 구조조정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금융계 관계자는 "은행으로선 부실화된 외화대출 때문에 BIS비율이 떨어졌고 한은은 통안증권 이자부담 때문에 통화관리에 제약을 받고 있는 만큼 은행이 보유한 통안증권과 한은의 예탁금을 동시에 털어버리는 등의 방법으로 이를 정리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한편 한국은행 관계자는 "지난해말 은행에 긴급지원했던 2백33억달러 가운데 8월말까지 1백40억달러는 회수했다" 며 "나머지 93억달러도 올해 안에 회수할 예정" 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지난해말 이전에 준 외화예탁금은 정부가 정책필요에 따라 지원했기 때문에 한국은행 권한 밖의 일이었다" 고 해명했다.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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