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윤종갑과 헤어져 가게로 돌아왔으나 일손이 잡힐 리가 만무했다.

그동안 승희의 행동으로 보아서 철규와의 사이에 개운치 않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긴가민가해서 기분을 살짝살짝 건드려 온 것이 아닌 잠자리를 같이했을 만큼 확실하게 밀착되어 있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섬뜩하게 자리잡아버린 배신감과 상처는 그렇기 때문에 쉽사리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적인 거리로는 철규와의 관계가 그와 동거하기로 작정하기 전이었다 할지라도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던 변씨나 당사자인 철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두 사람의 동거를 위해 축배까지 들었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봉환을 한낱 미물인 벌레로 취급했다는 증거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가슴이 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윤종갑의 고자질을 반신반의하는 것도 아닌데,가슴 속은 이상하게 착잡했다.

필경 분통을 삭이지 못해서 가게의 기물을 부수고 쑥밭으로 만들어야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배신감을 어느 정도 삭일 수 었었을 텐데,가슴 속은 차분해지기만 했다.

그는 조리대와 술청의 식탁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는 묵호댁의 거동을 멀건 눈으로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윤종갑을 찾아간 것이었다.

윤씨는 그가 찾아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집에 있었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설쳐대는지는 몰라도 초저녁에 형님이 동업하자는 말을 꺼내다가 만 것 같아서 확실하게 하려고 찾아왔어요. 형님 말이 진정이라면, 구체적으로 이바구가 돼야 하지 않겠습니껴. "

"앙갚음해서 속시원하게 설분을 하자면, 그 놈들을 뒤쫓아가서 모조리 잡아 엎치고 칼부림이라도 해보는 것이겠지. 그러나 분통을 삭이고 한 발 물러서서 볼라치면, 그런 방법이 당장에는 속시원할지는 몰라도 후유증이 심각하지 않겠나. 그놈들이 나와 임자를 배신한 것이지만, 법으로 따지고 들면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난 증거가 없으니 우리가 까닭없이 행패 부린 것밖엔 아무 것도 아니지. 우리만 폭력배로 몰려서 큰집 신세질 것이 뻔하지. 그렇다면 방법을 달리할 수밖에 없겠는데, 그게 바로 우리 두 사람이 똘똘 뭉쳐서 저놈들 뒤따라 다니면서 망조 들게 만드는 방법밖에 딴 방책이 없지 않은가. "

"그 사정은 나도 알고 있는 일이니 두 번 다시 얘기할 것 없습니더. 나는 지금 당장은 종잣돈도 없고,가진 것이라고는 부랄 두 쪽 하고 용달트럭 한 대뿐인데, 이것 가지고 장삿길 나선다는 게 무모한 일이 아니겠습니껴?"

"용달트럭 한 대에 운전기사 있으면 됐지, 지금 당장 종잣돈이 무슨 소용이여. 내 안면 한 가지를 담보하고 외상으로 물건 떼다가 팔아서 수금 되는 대로 본전 갚으면 되는 길도 없지는 않지만, 두어 달 동안 쓸 경비는 마련할 방법이 없지 않으니 무턱대고 안달할 것 없네. 우리가 저놈들과 처음 장삿길 나설 적에 뭉칫돈 갖고 시작했었나?"

"그럼 자동차가 시방 정비소에 들어가 있으니 차 빼는 대로 곧장 떠나시더. " "그것도 저놈들과 겨뤄서 밀리지 않으려면 우리도 일행이 셋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해롭지는 않겠지요. 신실한 사람이 있겠어요?"

"내 외사촌 아우 중에 배완호 (裵浣浩) 라고 부산에서 금융회사에 다니다가 서너 달 전에 퇴직하고 대전 집에 와서 빈둥거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나이는 임자보다 서너 살 손아래야. 그 녀석을 불러볼까?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제 손으로 뒤 닦는 일이 무서워 종일 참고 있다가 집에 와서야 화장실을 갈 만큼 괴팍스럽던 성품이어서 장돌뱅이로 나서자면, 선뜻 나설지는 모르겠으나 임자가 찬성을 한다면 내가 설득해보겠네. "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