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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철 사색의 깊이 더하는 산문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가을은 다시 올 테지//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속세에 전혀 물들지 않은 천상의 순수시인 천상병이 가을을 보내며 노래한 '들국화' 일부다.

산등성 외딴 곳 애기 들국화 빛깔과 파란 가을 하늘의 겹침을 보며 때묻지 않은 만남을 소망했다.

그만큼 가을은 번잡한 일상 속에 잊어버린 우리 마음을 찾아나서기에 좋은 계절이다.

올 가을 독서의 의미는 각별하다.

환란 (換亂) 의 상처가 아직껏 깊게 패인 상황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계기가 되기 때문. 흔들리는 나를 바로잡고 남들과 관계도 성찰하게 한다.

가을철 출판가에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산문집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일본인 사이에 '이 시대의 스승' 으로 불리는 스즈키 히데코 (鈴木秀子) 수녀의 '사랑과 치유의 366일' (생활성서刊) .날마다 한 편씩 제시하며 생명.죽음.사랑.고통 등 인간의 근원적 내면을 사색하고 있다.

특정 종교의 입장을 넘어 분노와 슬픔, 우울과 불안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지혜가 담겨있다.

오늘 9월10일의 한마디도 시의적절하다.

"인간의 생존본능이 위협받게 될 때 인생의 참가치를 찾게 된다.

없어서는 안 될 것과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분별하는 좋은 기회다.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즐거움으로부터 이기심을 버리는 즐거움으로 인생의 의미가 뒤바뀌는 때다.

" 불교신문 이학종 기자의 '산승의 향기' (운주사) 는 서옹.월하.월산.승찬.원담 등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 (高僧) 25명의 치열한 삶을 보여준다.

저자가 일일이 인터뷰해 목소리도 생생하다.

불교와 인연을 맺은 사연은 저마다 다르지만 구도정신과 삶에 대한 애정에는 차이가 없다.

더욱이 개인적.시대적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수행 모습은 무기력과 절망에 빠진 우리들을 재정립하는 기회를 준다.

나이 마흔에 늦깍이로 출가한 구암스님은 "오직 마음에 진리가 있고 어떤 일이든 블가능한 것은 없다" 고 했다.

불교춘추사에서 나온 '티베트 사자의 서' 도 삶의 지침을 제공한다.

'사자의 서' 는 티베트에서 임종을 앞둔 사람들에게 읽어주는 경전. 종전에도 여러 번 번역됐지만 이번에는 일본 NHK방송이 현지 취재한 내용을 담아 현장감이 돋보인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생명의 본질은 마음이라는 불교의 진수가 울려퍼진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진리를 전달하며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의 깨달음이라 말하고 있다.

동국대 이창배 (영문학) 교수가 엮은 '미국 초절주의자 3인선' (동국대 출판부) 은 19세기 미국 초절주의자 에머슨.소로.휘트먼의 산문과 시를 소개한다.

초절주의는 경험적.현상적 세계를 넘어 관념적.초월적 우주관을 주장해 동양의 불교.노장사상과 통한다.

자연.역사.경제.독서 등 주제도 다양하며 소박한 삶에 대한 예찬, 자연과 교감 등이 눈앞의 이익에 정신없는 현대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이형기 시인은 읊었다.

"별빛을 등불 삼아 그 책장을 넘기면/위잉 위잉 후루룩 위잉/그것은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 ( '나의 집에서' 중) 라고. 이 가을 책장을 넘기며 삼라만상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 어떨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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