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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프런트] 트레일러 덮개 열면 과학교실로 … “와, 변신자동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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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 1일 오전 9시, 충남 태안읍 화동초등학교 운동장에 9.5t짜리 트레일러 1대가 들어왔다. ‘ㄱ’자로 붙어 있는 차의 천장과 한쪽 옆면이 ‘지잉’ 소리와 함께 내려오면서 널찍한 무대로 변신했다. 이어 트레일러 안에 숨어있던 대형 전광판이 위로 올라갔다. 전광판 화면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트레일러 뒷문을 열고 10여 명의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이동과학교실 연구원들이 과학 연극에 쓰는 실험도구를 들고 무대로 변신한 트레일러 위에 섰다. 한 해에 100일 이상을 동고동락하는 이들은 “서로의 표정만 봐도 기분을 알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태안=프리랜서 김성태]

이번엔 뒤따라온 다른 트레일러의 문이 열렸다. 박스에 담긴 노란색 천 뭉치를 운동장에 깐 뒤 송풍기를 연결하자 순식간에 부풀면서 아치 모양의 에어돔(그늘막)으로 바뀌었다. 간이 낚시의자 100여 개를 들여놓자 어엿한 공연장이 됐다. 교실 창문마다 아이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와! ‘트랜스포머’다.”

이 특수 차량은 한양대 청소년과학진흥센터가 운영하는 ‘이동과학버스’. 센터 연구원들이 전국의 산골·섬마을을 돌며 학생들에게 과학 연극과 실험을 보여주는 데 쓰이고 있다. 넉넉지 못한 교육 여건에 있는 시골 아이들이 과학 원리를 생생하게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산타클로스가 돼 왔다. 이동과학버스가 입소문을 타자 58개 교 방문이 예정된 올해 1300개 교가 신청을 해왔다. 2년 전 한 중학교에선 전교생이 “우리 학교에 꼭 와달라”며 종이학 800마리를 접어 보내기도 했다.

이날 오전 11시, 에어돔 아래 전교생 65명이 모였다. 연극 ‘심봉사와 뺑덕어멈’이 무대에 올려졌다. 뺑덕어멈 역할의 조숙휘(29·여)씨가 백혜림(10)양을 무대 위로 불렀다. “이 용기에 담긴 두 가지 용액을 섞어봐요. 자, 이렇게.” 백양이 유리막대로 용액을 젓자 흰 거품이 올라왔다. 조씨가 용기를 거꾸로 들고 땅에 던졌다. 놀란 아이들이 ‘와’ 하고 탄성을 뱉었다. “여러분 신기하죠? 두 용액이 만나 합성 스티로폼이 된 거예요. 여러분 운동화 깔창으로도 쓰이는 거죠.”

보통 트레일러와 다를 바 없지만 버튼 하나만 누르면 30분 안에 무대로 바뀐다. 에어돔(그늘막)이 씌워지고 간이의자가 놓이면 100명이 넘는 관객을 소화할 수 있다.


변신 트레일러에서의 신나는 과학 수업은 오후 내내 이어졌다. 소리 나는 부메랑도 만들고, 번개를 재현하는 실험도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램프를 만든 방기승(12)군은 “화학물질 용액이 굳어져 딱딱한 플라스틱이 된다니 신기하다”며 웃었다.

11명의 연구원은 아이들의 함박웃음을 볼 때마다 피로가 싹 가신다. 이들은 1년에 100일 이상을 길 위에서 보낸다. 생사의 문턱을 넘을 때도 많았다. 고은혜(29·여)씨는 “지난해 여름엔 고속도로를 달리다 바퀴가 터져 차량이 돌면서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변신 트레일러가 못 가는 곳은 없다. 차 덩치가 크다 보니 제주도에 갈 땐 인천에서 배를 타고 12시간을 간다. 강성석(29) 연구원은 “어떤 학교는 입구의 경사가 심해 근처 산에서 쓰러진 나무를 끌어다가 바퀴 아래 지지대를 만들고 끙끙대며 밀어 올린 적도 있다”며 “강연을 못할 뻔한 순간도 많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결혼 2년째인 신경은(32·여) 팀장은 첫 결혼기념일도 남편과 떨어져 도로 위에서 보냈다.

연구원의 절반 이상이 석사 학위를 가졌지만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비정규직 신분이다. 이동과학버스가 시작된 2002년부터 일해온 이언진(31·여) 팀장은 “근무 조건이 더 좋은 직장이 많지만 이 일이 주는 보람만큼은 그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각 학교에서 사연을 적어 보낸 신청서를 볼 때면 더 많이 다니지 못하는 게 미안하다”고 했다. 전날 청양초등학교에 들렀던 이들은 이날 오후 실험을 마치자마자 다음 방문 예정지인 예산으로 향했다.

◆다른 변신 트레일러=교육청들도 ‘이동과학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버스를 개조한 이동과학차를 운영해온 경기도과학교육원은 지난해 트레일러를 구입해 6학급 미만의 도내 초등학교에서 과학 실험과 별자리 관측 교실을 열고 있다. 전북과학교육원도 매년 30여 개의 소규모 학교에 이동과학차를 보내는 사업을 10년째 하고 있다. 한양대 청소년과학기술진흥센터 황북기(48) 교수는 “도시 아이들은 전시회나 연극 등을 통해 과학을 접할 일이 많지만 시골 아이들은 그럴 기회가 없다”며 “산골 학교에서 에디슨 같은 과학자가 나오는 게 이동과학버스 팀의 꿈”이라고 말했다.

태안=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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