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37. 나는 영원한 농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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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 신용보증기금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과 캐나다로 여행갔을 때의 필자(뒷줄 오른쪽에서 둘째).

지난해 12월 20일은 한국농구연맹(KBL)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날이었다. 이날 나는 집에서 프로농구 삼성-모비스 잠실 경기를 TV로 보고 있었는데 4쿼터 중반 무렵 '안양 SBS-전주 KCC전 몰수경기'라는 자막이 나왔다. 판정에 항의하던 SBS의 정덕화 감독이 퇴장당하자 이상범 코치가 심판진에 끈질기게 해명을 요구한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 SBS 선수들은 경기를 중단하고 코트에서 나왔다. 심판진은 SBS 선수들에게 경기를 속개하라고 요구했으나 그들이 응하지 않자 KCC의 승리를 선언해 버렸다.

나는 과연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했다. 프로경기에서 게임을 안 하겠다는 건 팀의 간판을 내리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처사였다. 미국프로농구(NBA) 50년 역사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나는 이날 밤을 꼬박 새우며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를 곰곰 생각했다. 다음날 나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KBL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때 한 기자가 "경기 중단 사건에 대해 총재가 책임지는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고 물었다. 순간 나는 '우리 사회가 참 관대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무대감독.연출자.배우가 공연 도중 서로 싸우다 일방적으로 막을 내리고 관객을 돌아가게 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바로 단장이다. 이번 경기 중단 사건도 구단.심판.선수.지도자가 서로 싸우다가 생긴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KBL 수장이 책임을 져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KBL 총재를 그만둔 뒤 3개월여 동안 나만의 자유시간을 만끽했다. 신용보증기금에서 함께 근무한 옛 동료 여섯명과 캐나다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설악산.홍도 등 국내 명소도 둘러봤다. 요즘은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많이 보내며 손자.손녀들의 재롱을 보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다. 자주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골프도 즐기고 있다. 고려대 법대 동기인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박종석 한화 회장, 박수길 전 유엔대사, 김인섭 전 태평양법률 대표 등은 나와는 골프 맞수다.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경기를 벌이곤 한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 그러나 나의 농구 사랑은 여전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한국 농구는 기술.경기력 면에선 발전을 거듭해 아시아 정상권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선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페어 플레이는 서로 존중하는 것(Fair play means respect)이다. 승리에 눈이 어두워지면 스포츠가 갖는 높은 이상과 교육적 가치를 외면하게 된다. 구단은 KBL과 다른 구단을, 선수는 심판을, 심판은 지도자를, 지도자는 KBL 이사회를, 이사회는 집행부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다.

내가 주재한 마지막 KBL 이사회에서 이렇게 당부했다. "이제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서로 존중하면서 무엇이 옳은가를 찾아내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가치를 되찾아야겠다. 그 방법은 우리 모두가 프로농구 출범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싶다. 한국 농구여, 영원히 발전하라.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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