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KT 민노총 탈퇴 … 새로운 노동운동 계기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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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우리나라에서 상급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노조 조합원 수는 2003년의 4만4000명에서 2008년에는 28만3000명으로 급증하고 있다. 최근엔 KT노조가 조합원 95% 투표에 95% 찬성이라는 압도적 결과로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민주노총의 투쟁노선에 대놓고 말을 못하던 일선 조합원들이 선거를 통해 불만을 폭발시킨 셈이다. 올 들어 울산 NCC·서울도시철도 등 17개 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단일 기업노조로는 최대인 KT노조가 탈퇴하고 산별노조연맹체(IT연맹) 하나가 공중분해될 위기에 몰리는데도 민주노총은 “사측이 개입했을 의혹”을 제기하며 자기 쇄신의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질까. 한마디로 글로벌 노사문화 트렌드와는 상당히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노동계는 ‘집권화→분권화(당사자 주의)’ 트렌드를 역행하고 있다. 중앙지도부는 자신들이 결정한 것을 조합원이 그대로 믿고 따라 주길 바라고 있다. 국가 지도자에게는 ‘소통과 포용’ 정치를 요구하면서도 자신들은 조합원이나 정파 간의 소통과 포용에 무관심하다. 그 결과, 독단적·전횡적인 투쟁지침이 나오고, 현장에서는 거부와 갈등을 빚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둘째는 경제가 아닌 정치가 노동운동의 중심에 섰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일부 시민단체나 식자들은 ‘노조=약자=선인(善人)’이라는 등식을 만든 후 정치적 성향의 선명성 경쟁을 펼쳐 왔다. 특히 민주노총은 노동집단인지, 정치집단인지, 이념단체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대북정책 등을 놓고 거리투쟁에 앞장서 왔다. KT노조가 탈퇴하면서 “정치투쟁은 조합원의 요구나 정서와 다르다”고 했다. 민주노총을 탈퇴한 다른 노조들도 “정권과의 한판 싸움과 같은 정치투쟁을 하는 순간 이미 노조의 성격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정치중심→경제중심’으로 흐르고 있는 전 세계 노조활동과 동떨어져 있다는 얘기다.

또 교섭 여부와 상관없이 파업 날짜를 미리 못 박아 놓는 등 교섭 시작 단계부터 대화와 협상보다는 파업과 투쟁을 통해, 이른바 ‘쟁취한다’는 ‘선(先)파업 후(後)교섭’ 전략도 이제는 과감히 버려야 할 시점이다. 2002~2006년 5년 동안 발생한 불법 분규의 87%가 민주노총 산하 노조 사업장이란 사실은 이런 점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개인의 이익배분 중심→조직의 경쟁력 강화 중심’으로의 트렌드 변화도 필요하다. 무한경쟁의 글로벌 사회에서 조직의 경쟁력을 경시한 분배 우선의 노동운동은 지금 당장의 주머니는 두툼하게 할지 모르나 조직의 미래 성장잠재력을 쇠잔하게 해, 결국 노사 모두를 공멸의 길로 몰아가게 된다. 미국 GM이 대표적 사례다. 상급 단체인 UAW는 과도한 임금인상, 공장가동률 80% 유지 등 경영환경의 변화를 도외시하고 노조와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만 우선시했다. 이에 따라 장기적인 투자보다는 단기적 재무성과에 치우치다 파산보호를 신청하게 된 것이다.

‘지도부의 특권화’를 깨야 한다. 대신 ‘지도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해야 한다. 전 세계 노조는 조직운영의 민주성·도덕성·재정투명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선 사용자에게는 강력히 요구하면서 자신들에게는 매우 온정적이며 무감각하다. 채용 비리, 조합비 유용, 성폭력 사건 등에 대한 노조 지도부의 일련의 언행과 사후 조치가 그런 예일 것이다.

노동계는 이런 글로벌 트렌드를 하나의 잣대로 해서 자가진단을 해 볼 필요가 있다. KT 조합원들은 민주노총 탈퇴 건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킨 뒤 “이제야 노조가 된 것 같다”면서 ‘새로운 전략과 비전을 겸비한 노동운동’을 천명했다. 이 말에 들어있는 깊은 의미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되짚어보길 바란다.

장상수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경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