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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두려워 … 親李도 민주당도 권력분산론 만지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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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호 10면

김형오 국회의장이 제헌절에 개헌 공론화를 주장했다. 국회 개헌 특위를 구성해 9월 정기 국회에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내년 6월 지방 선거 이전까지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를 마무리하자”며 개헌 시한도 내놓았다. 국회의장 직속 자문기구인 헌법연구자문위원회는 이달 말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는 내용 등이 담긴 헌법 개정안을 의장에게 제출할 예정이다.

김형오 의장 ‘개헌 공식 제안’ 그 후

중요한 건 정치권의 공감대 형성이다. 여야가 “하자”고 해야 개헌의 동력은 생긴다. 그러나 여야와 각 정파의 속셈은 제각각이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지금은 국회 정상화가 먼저”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는 “현행 헌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개헌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했다. 한나라당에선 친이, 친박의 생각이 다르다. 김 의장이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개헌의 목소리를 높였다. 왜일까.

총선·대선 한 해 치르는 ‘20년 만의 기회’
우선 시간이 촉박하다. 김 의장은 ‘내년 6월’을 마감 시한으로 제시했다. 그 일정에 맞추자면 지금 당장 논의를 시작해도 빠듯하다. ‘헌법 개정안 발의-공고-국회 의결-국민투표’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짧아도 4개월은 소요된다고 한다. 여기에 여야가 합의하는 데 드는 시간이 추가돼야 한다. 10월엔 각급 재·보선이 있고 12월까지 정기 국회가 이어지는 일정도 있다. 내년 초엔 지방선거 공천 문제로 여야가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김 의장이 제헌절을 계기로 개헌 공론화를 주장한 건 이런 점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내년 1~2월에 개헌안을 공고하고, 5월에 국회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킨 다음 6월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를 함께 실시하는 방안이 좋다”고 말했다.

지방선거가 치러진 다음에 개헌을 하는 건 쉽지 않다. 이때부턴 이명박 정부가 집권 하반기로 들어간다. 차기 대권 주자들이 뛰기 시작하면서 이해 관계가 얽힌다. 개헌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어려워진다. 2007년 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4년 중임제’를 위한 ‘원포인트 개헌(권력구조만 손질하자는 내용)’을 제안했지만 정치권은 대선이 임박했다는 이유로 수용하지 않았다.

김 의장은 의원들 사이에 개헌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17일 “18대 국회의원의 3분의 2가 개헌에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개헌에 찬성하는 18대 의원들의 모임인 미래헌법연구회 회원은 186명이다. 개헌 통과선(정족수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숫자다. 한나라당·자유선진당·친박연대 등 보수 정당이 연합할 경우 개헌 통과선을 넘어선다.

2012년엔 총선(4월)과 대선(12월)이 함께 실시된다. 대통령 임기(5년)와 국회의원 임기(4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시차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게 개헌 찬성론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2012년을 넘기면 개헌을 하기 위해 20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와 미래 권력 충돌하면 개헌 어려워
개헌을 하자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22년 전에 쓰여진 ‘87헌법’이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장기집권을 막기 위해 도입된 5년 단임제가 한계에 봉착했으며 ▶총선·대선의 시기 불일치로 국력이 낭비되고 있다는 점 등이다. 문제는 그런 이유로 개헌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느냐다.

강경근 숭실대 법대 교수는 “제1, 제2, 제3공화국 탄생에 버금갈 만한 동력이 있는가, 개헌에 대한 절실함이 있는가가 의문”이라고 말했다. 4·19 혁명이나 6·10 항쟁처럼 정치의 지각변동을 일으켜 개헌의 급물살을 타게 할 거대한 동력이 아직은 없지 않으냐는 게 강 교수의 지적이다.

부산대 김배원 교수는 “지금까지 헌법 개정의 주요 관심사는 권력 구조의 개정이었다”며 “개헌 문제는 아주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라고 말한다. 권력 구조를 개정하려면 사회적 공감대 형성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권력’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미래의 권력’을 대표하는 차기 대권 주자 사이에 충돌이 없어야 한다. 한나라당의 경우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비슷한 생각을 한다면 개헌의 동력은 훨씬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대통령은 개헌과 관련해 ‘소극적 긍정’이란 입장을 보여왔다. 대선 출마 전인 2007년 1월에는 “원칙적으로는 반대하지 않는다. 다음 정권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헌법 개정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했고, 당선인 시절에는 “지금은 경제를 살려야 하니 적당한 시기에 (개헌 논의를)해야 한다”고 말했다. 4년 중임제에 대해서는 “제도보다 임기 중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사람의 문제”라며 거리를 뒀다. 또 “권력 구조뿐 아니라 기본권·환경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며 권력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개헌론에는 거부감을 나타냈다.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개헌에 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시위, 경제위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 대형 사태가 터진 데다 정치적 휘발성이 아주 강한 개헌 문제를 대통령이 직접 건드릴 경우 정치 논란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김 의장의 개헌 공론화 주장에 대해 “개헌은 국가 백년대계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국민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이동관 대변인)는 원론적인 논평을 낸 건 이런 맥락에서다.

박근혜 전 대표는 ‘4년 중임제’와 ‘총선·대선 시기 일치’에 찬성한다. 18대 국회 때 개헌해야 한다는 의견도 밝힌 바 있다. 지난해 7월에는 “개헌 논의를 하루빨리 시작해야 한다. 지난해 대선 당시 여야 간에 다음 정권에서 개헌을 하기로 거의 공감대가 이뤄졌다”고 말한 적도 있다. 올해 5월 미국을 방문했을 땐 “선거 주기를 맞추려면 매번 맞출 수 있는 게 아니다”고도 했다.

청와대 “국민적 합의 전제돼야”
그러나 박 전 대표는 대통령은 외치, 총리는 내치로 권력을 분점하는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달 2일 몽골을 방문했을 때 이에 대해 기자들이 묻자 그는 “헌법에 있는 정신을 제대로 잘 지켜나가고 있는가부터 생각해야 한다. 당헌·당규도 만들어 놓고 안 지키면 소용없지 않느냐”고 답했다. 박 전 대표는 자신이 당 대표 시절 만들어 놓은 정당 민주화 방안을 친이계가 당을 장악한 다음 후퇴시켰다고 지적해왔다. 그가 친이계의 분권형 대통령제 주장도 일종의 정략으로 받아들인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견해다.

안상수 원내대표, 공성진 최고위원, 홍준표 전 원내대표 등 친이계는 그동안 분권형 대통령제를 여러 차례 주장했다. 그런 그들에 대해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는 “박 전 대표가 현행 헌법 체제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걸 상정할 때 친이계는 굉장히 커다란 정치적 부담을 느끼는 것 같고, 일종의 공포감마저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는 “개헌을 통해 권력을 분점토록 하면 총리만큼은 자기들이 가질 수 있어 결국 권력에 동거할 수 있다고 보는 게 친이계의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민주당에서도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책임제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한 민주당 재선 의원은 “여당과 달리 뚜렷한 차기 대선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권력을 분산하는 시도를 하는 게 최선의 방법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주자로 압도적 1위를 지키고 있는 ‘박근혜 원톱’이라는 차기 대권 구도가 개헌 논의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17일 “권력 구조 개헌론은 너무나 근시안적인 옹졸한 생각”이라며 “연방제 국가로 국가 구조를 대개조해야 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 총재는 2007년 대선 때부터 전국을 5~7개 광역단위로 묶어 외교와 국방 등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는 ‘강소국 연방제’를 주장했다. 그런 이 총재가 개헌 문제로 이 대통령과 손을 잡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박근혜 전 대표에게 유리한 대통령 중임제를 막기 위해 두 사람이 연대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97년 대선 때 내각제를 고리로 힘을 모았던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의 재판이 이 대통령과 이 총재 사이에서 이뤄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친박계에서 가장 경계하는 시나리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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