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직배사들,이젠 한국영화 제작·배급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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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직배사들의 한국진출 10년. 이젠 이들이 한국영화 제작.배급에 직접 나서 국내 영화시장의 판도에 큰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최근 월트 디즈니의 배급사 브에나비스타가 12일에 개봉되는 '남자의 향기' (장현수 감독) 국내배급을 맡은 데 이어 20세기 폭스사는 현재 후반작업 중인 '실락원' (장길수 감독) 의 비디오 판권을 구매, 제작비의 절반 정도를 지원했다.

이런 움직임을 두고 직배사가 드디어 한국영화 제작사와 동반체제를 구축하고 나섰다며 반기는 움직임도 있지만 이것이 향후 국내 극장에 대한 직배사의 장악력을 더욱 확고히 할 것이라는 우려도 적잖다.

우선, 배급망이 약한 소규모 제작사들이 직배사의 탄탄한 배급망을 타고 영화를 풀게돼 큰 이득을 보게됐다.

'남자의 향기' 는 서울 24곳을 포함해 전국 40여곳에서 상영된다.

'남자의 향기' 제작사 두인컴측은 "브에나비스타의 배급으로 상영관을 수월하게 확보한 것은 물론 비디오 판권도 6억원에 판매, 제작비에 큰 도움을 받았다" 고 말했다.

반면, 극장들은 앞으로는 직배사의 영향력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직배사들이 자사 영화의 장기상영 등 무리한 요구를 해 오는 경우, 극장들은 스크린쿼터제 (한국영화 의무상영제도) 를 방패로 버틸 수 있었으나 앞으로는 이것이 힘들어 지리라는 것이다.

한 극장관계자는 "겉으론 한국영화에 대한 일종의 '서비스'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국 영화시장을 직배사가 좌지우지하게 돼 결국 국내 극장들이 직배사들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 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극장들은 당장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처지. 극장 운영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직배사의 소프트웨어 때문이다.

브에나비스타는 올 상반기의 히트작인 '아마겟돈' '뮬란' 을, 20세기 폭스사는 '타이타닉' 등 흥행 대작들을 배급했다.

한편 브에나비스타가 '남자의 향기' 배급에 나서자 같은 날 개봉되는 '실락원' 을 개봉키로 했던 몇몇 극장들이 '남자의 향기' 로 프로그램을 바꾸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앞으로도 직배사의 제작.배급이 늘어나면 국내 배급사와 직배사 간의 배급 경쟁은 더 가열될 전망이다.

김상일 브에나비스타 한국지사장은 "국내 배급력이 전혀 없는 신생 영화사 두인컴을 돕고 싶어 배급을 맡은 것 뿐" 이라며 "오히려 직배사의 투명하고 체계적인 배급망이 국내 영화시장 유통망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 이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일축했다.

브에나비스타와 20세기 폭스는 앞으로 좋은 시나리오를 찾으면 한국영화 제작에 투자하고 해외배급에도 나서겠다는 계획도 밝혀놓은 상태다.

국내 배급사의 한 실무자는 "직배사가 한국영화 제작에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 배급에만 나서는 것은 곤란하지 않겠느냐" 면서 "직배사가 정말로 한국영화 제작과 해외 배급까지 나서줄 지는 지켜볼 일" 이라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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