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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즌 필은 금융시장의 독약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3호 30면

최근 기획재정부와 법무부를 중심으로 경영권방어제도의 독약 조항인 포이즌 필(Poison Pills)에 대한 도입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정부는 외국계 사모펀드들의 국내 기업에 대한 적대적 M&A나 일정 주식을 사들인 뒤 비싼 값에 되사라고 경영진을 압박하는 그린메일을 노리는 투기성 외국자본의 침투를 차단하고, 경제 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기업가들의 투자의욕을 높이기 위해 경영권방어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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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존 경영자들의 모럴 해저드, 소유 경영자의 경영권 독점, 기업사냥꾼들에 의한 무분별한 적대적 M&A 시도, M&A의 실체에 대해 무지한 경제관료들의 무분별한 제도 도입 등에 따른 문제점이 혼재돼 있어 포인즌 필과 같은 경영권 방어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포이즌 필 조항은 적대적 M&A가 기승을 부렸던 1982년에 경영권 방어 수단의 하나로 미국에서 처음 도입됐다. 포이즌 필은 적대적 M&A에 의해 경영권을 빼앗길 수 있는 위기에 놓인 기업의 경영자들에게 거액의 퇴직금을 지급하는 황금낙하산(Golden Parachute) 조항을 만들거나 이사회의 결의만으로 특정 주주 또는 제3자에게 할인된 가격으로 대규모 신주를 발행해 인위적으로 지분율을 높일 수 있는 특혜를 주는 방법이다.

주식회사의 기업 공개가 활성화되고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주식투자가들이 등장하면서 경영권 분쟁은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부각되고 있다. 경영권 가치에 대한 인식 또한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영권에 관련된 제도를 정비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리고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면 이 또한 고려 대상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경영권 시장의 질서를 규정하는 제도가 균형을 잃거나 사족에 불과한 규정으로 누더기를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히 포이즌 필과 같은 독약 조항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그것은 독약은 어떻게 사용해도 필연적으로 독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약은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도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면 경영권 방어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런데도 포이즌 필과 같은 경영권 방어 조항을 상법이나 자본시장통합법 등에 추가한다면 기존의 대주주 또는 경영자들에게 경영능력과 무관한 난공불락의 경영권 안전지대를 제공하게 될 수도 있다. 회사나 일반 주주의 입장에서 보면 포이즌 필을 통해 기존의 경영자들에게 엄청난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이나,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기업사냥꾼들에게 기업 자산의 일부를 빼앗기는 것이나, 기업의 재원이 특정인에게 유출되는 것은 마찬가지며 기업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큰 조항을 추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 등과 같은 국가에서도 포이즌 필과 같은 독약조항을 사용하는 것은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이다.

또 포이즌 필과 독약조항은 악용의 소지가 많다. 예컨대 특정인이 적대적 M&A를 활용해 경영권 분쟁을 조장하는 경우 기존의 경영진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그렇다. 포이즌 필 조항에 의해 혜택을 받게 되는 기존의 경영진이 가짜 기업사냥꾼을 동원해 공개매수와 같은 방법으로 적대적 M&A를 시도하게 해놓고 포이즌 필 조항을 들어 혜택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공개매수 가격은 매우 낮게 제시될 것이다. 또 포이즌 필이 도입된 특정 기업의 경우 이사회 결의로 특정 주주 또는 제3자 배정에 의한 신주 발행이 가능하게 정관을 변경해 놓았다면 상속·증여 분야에서도 세금을 회피할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이 개발될 것이다. 상속 시에는 상속세를 절감하기 위해 상속 주식의 비율을 낮추고 상속이 완료된 후에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는 것과 같은 유사한 상황을 만든 뒤 포이즌 필 조항을 근거로 지분율을 높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상속세뿐 아니라 시장을 상대로 시세차익을 노리는 주가조작도 가능하게 된다.

포이즌 필은 또 특정 세력에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 기업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되어 시장으로부터 외면받을 수 있다. 세계적인 투자기관인 미국의 칼퍼스(CalPERS), 영국의 헤르메스(Hermes),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인베스트먼트(bcIMC) 등의 대형 기관투자가들이 포이즌 필과 같은 독약 조항의 철회를 요구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포이즌 필 조항을 도입한 일본의 초고속 인터넷 사업자인 이엑세스, 화장품 업체인 시세이도는 이를 포기했다. 이후 두 회사의 주가는 다시 상승했다.

한국 증시는 이제 막 다양한 투자금융기법과 M&A 전략을 경험하고 있다. 정부 관료들이 무분별한 규제정책을 남발하는 것은 선진 금융, 첨단 증시로 가는 걸림돌이 될 뿐이다. 포이즌 필과 같이 특정 경영자나 주주에게 특혜를 주는 정책은 한국의 투자금융과 주식시장이 세계의 허브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을 가능성이 크다. 기업 투자를 유도한다는 당장의 이익을 위해 장기적으로 득보다 실이 큰 정책을 마구 도입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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