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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해발 1000m 라벤더 마을의 ‘보랏빛 향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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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가마에 라벤더 쪄 오일 얻는다

프랑스 동남부. 파리에 이어 둘째로 큰 도시 리옹에서 버스로 3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도시 발랑스. 인구 16만여 명의 소도시인 발랑스에서 다시 차를 타고 1시간여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오른 곳은 주민 수 25명의 레슈엉디와 마을이었다. 알프스 산맥, 몽블랑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마을을 둘러싼 풍경이 한국의 강원도를 연상케 한다. 해발 1000m를 넘는 마을 곳곳에서는 연보랏빛 라벤더가 한창이었다. 7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가 라벤더 수확철이다.

지중해가 원산지인 라벤더는 두통 치료와 신경 안정 등의 효능이 있다고 해서 서양에서는 민간요법에 널리 쓰인다. 향이 좋아 아로마 오일, 향초 등으로 만들고 화장품 원료로도 인기가 높다. 최근 국내에서도 라벤더 등 천연 아로마에 대한 관심이 높다.

오일을 추출하는 전통 가마에 불을 떼던 주민 이브 베르망이 라벤더 오일 추출법을 소개했다. 그는 현재 레슈엉디와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원로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수백 개의 전통 가마가 있었죠. 장작 떼고 남은 재로 추출기 원통의 이음새를 바를 만큼 자연 그대로의 장치예요.” 지금은 현대화된 압착기가 주로 쓰이고 있지만 여전히 한편에서는 전통 방식으로 라벤더 오일을 추출하고 있었다. 라벤더 오일 거간꾼인 미셸이 설명을 거들었다. “현대식 압착기도 유기농 원칙에 맞도록 냉각 시스템엔 물을 씁니다.”

라벤더 오일 추출 방법은 이렇다. 우선 꽃을 포함한 줄기까지 가마에 넣고 수 시간을 쪄낸다. 가마솥 뚜껑에는 찜솥에서 나온 증기를 모으는 원통이 있고 원통에 모인 증기가 냉각수가 담긴 통을 지나 에센셜 오일과 물로 변한다. 현대식 추출기도 같은 방식. 유기농법으로 라벤더를 키우기도 어렵지만 오일을 뽑아내는 과정도 유기농 원칙에 맞추려면 그만큼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레슈엉디와에서 생산하는 라벤더 에센셜 오일은 현지에서 1ℓ에 180유로(약 33만원)에 팔린다. 1ℓ의 에센셜 오일을 뽑아 내려면 라벤더 1t이 필요하다.

재배부터 추출까지 모든 과정이 유기농

취재에 동행한 아베다의 최고 조향사 시오자와 고이치가 라벤더 수확 현장을 안내했다. 아베다는 유기농 화장품으로 유명한 미국 브랜드. 고이치가 라벤더에 대해 설명했다. “본래 야생에 서식하는 라벤더는 높은 산에서만 자랍니다. 레슈엉디와 같은 곳은 천혜의 환경이죠. 1년 내내 햇볕이 내리쬐고 서늘하거든요.” 고이치는 레슈엉디와 마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라벤더가 자라기에도 좋은 환경이지만 유기농법을 하기에도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입니다. 주민 수 25명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곳을 오염시킬 요인이 별로 없어요. 라벤더 밭에만 농약이나 살충제를 치지 않는 게 아니라 마을, 산 전체가 화학 약품 따위와는 거리가 먼 곳이죠.”

밭에선 열 살쯤 돼 보이는 소년들이 부모들의 라벤더 수확을 거들고 있었다. 소년들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농약이나 제초제를 친 풀밭이었다면 금세 피부에 이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토종 라벤더는 병충해에 약해 농부들은 늘 살충제를 뿌리고픈 유혹에 빠진다고 한다.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서라면 제초제도 필수. 하지만 유기농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이곳의 라벤더 밭에는 군데군데 이름 모를 들꽃들이 무성했다. 농부들은 라벤더를 수확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들꽃들을 꺾어내 버릴 뿐이다. 1시간여 작업을 지켜보고 직접 라벤더 수확도 해 봤지만 반팔, 반바지 차림의 취재진 누구에게도 피부 발진 같은 이상은 없었다.

고이치가 설명했다. “아베다는 유기농 원료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현지 농가에 유기농 전환 자금도 지원합니다. 그만큼 진짜 유기농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죠.” 유기농이라고 부르기 위해선 3년 연속 유전자 변형이나 석유화학 비료는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살충제나 제초제 사용금지 또한 물론이다. 심지어 벌레를 쫓기 위한 반사판 사용도 금지된다. 이런 까다로운 과정을 거친 원료를 사용하고 미국에 있는 제품 생산 공장의 공정까지 유기농 인증을 받았지만 정작 아베다에서 출시하는 화장품들엔 유기농 관련 인증 표시가 없다. 고이치는 이렇게 답했다. “아베다는 한 곳이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등 여러 곳의 기관에서 인증을 받아요. 그러다 보니 제품에 그 모든 마크를 넣을 자리가 없다는 게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갑자기 유기농 작황이 좋지 않아 다른 지역에서 급히 유기농 원료를 수급했는데 인증 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경우 때문이에요. 사실 마크 같은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화장품 회사보다 더 많은 유기농 원료를 쓰고 있다는 건 생산자인 우리의 신념이고, 소비자도 이미 그걸 알고 있으니까요.”

발랑스(프랑스 동남부 도시)=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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