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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샛별] 피아니스트 김규연, 콩쿠르서 악보 건너뛰고도 태연한 강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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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피아니스트 김규연(24)씨는 오늘 저녁 서울 신문로 금호아트홀에서 베토벤 소나타 2번, 31번과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한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제공]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중 7번째 곡을 연주하던 중이었다. 피아니스트 김규연(24)씨가 “길 가다 새똥 맞은 것 같은 일”이라고 칭한 ‘사태’가 일어난 것은.

올 5월,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있었던 일이다. 2차 예선에서 김씨는 ‘전람회의 그림’ 중 ‘시장’의 악보 두 페이지를 건너 뛰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빼먹고 뒷부분을 치고 있더라”는 것이다. 빠르고 날렵한 곡을 연주하다 무의식 중에 악보를 거스르게 된 이유는 지나치게 긴장을 해서도, 연습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천재지변을 만난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고 풀이한다.

그 후 두 달이 지났고, 김씨는 ‘전람회의 그림’을 독주회 곡의 메인 프로그램으로 넣었다. 큰 콩쿠르에서 한 대형 실수는 두고두고 남을 터. 그는 “그 부분을 연주할 때 당연히 위축 될 듯하다”면서도 독주회 프로그램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콩쿠르가 아닌 연주회에서는 어떻게 칠지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피아노보다 축구가 좋았다”=우리나라의 대표급 피아니스트 이경숙(65)씨의 딸, 어려서부터 각종 국내 콩쿠르를 휩쓸고 예원학교를 수석으로 들어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 입학생. 화려한 경력만큼이나 기대를 받으며 출전한 콩쿠르에서 쓴 잔을 마시고도 김씨는 상처를 거의 받지 않았다. “무대에 서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지 보자.” 이것이 그가 실패를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이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는 그에게 업(業)이기 전에 놀이였다. “정원에서 공 차고 노는 게 더 좋아 피아노는 뒷전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조선 시대의 역사에 푹 빠져 ‘조선왕조실록’을 끼고 다녔다. 피아노 연습은 많아야 하루 두시간이었다. 그는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을 잘 알고 있다. 대여섯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건 시간만 때우는 헛수고”라고 설명했다.

◆실수보다 두려운 것=지금도 그는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연습한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대신 연극·책·운동 등 넓은 관심사를 자연스럽게 살린다. 한때 대학로의 연기 학원에 다녔을 정도다.

피아노에만 목매지 않는 이 방식이 때로는 그를 자유롭게 한다. 이번 콩쿠르에서 실수를 하고 나서 읽었던 『손자병법』의 “소인은 일을 이루려하고 군자는 뜻을 이루려 한다”는 한 구절이 그에게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힘을 준 것이 한 예다.

지난달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협연자로 지목해 베토벤 4번 협주곡을 연주했던 김씨는 이번 독주회 이후 미국 버지니아에서의 협연을 앞두고 있다. “무대 위에서의 실수보다 감동없이 연주하는 게 더 두렵다”는 24세의 행보가 바쁘다.

▶16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02-6303-7700.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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