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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8월 그리고 50년]오늘의 시각-한미관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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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48년 '8월의 환희' 가 넘치고 있을 때 대한민국 탄생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미국은 한국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이 더는 전략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미국은 3년 전부터 '신탁통치' 라는 부적절한 구상으로 한국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47년 중반 군사점령을 마감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특별위원회' 를 설치, '우아하고 신속한 철수' '한국문제의 국제연합 이관' 이라는 '처방책' 을 내놓고 있었다.

이 구상은 48년 4월 '국가안보회의 (NSC) 8' 로 구체화되면서 주한미군 철수는 이미 실행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때의 한.미관계는 '개입과 철수' 의 양극단을 빠른 속도로 왕복하는 진자운동과 같은 것이었다.

정부수립과 동시에 진행된 미국의 철수정책, 그 후 2년 만에 반전된 '대규모 군사개입'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은 미국의 외교에서 부차적인 국가였다.

동아시아 정책에서는 일본.중국에 대한 이해관계가 항상 우선시됐다.

이같은 인식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다만 한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의 결과 미국의 주요 교역 및 투자대상국으로 부상했고 그 전략적 가치 때문에 양국간 이해관계의 크기가 48년보다 엄청나게 확대됐다는 차이는 있다.

탈냉전 초기 미국이 한때 구상했던 주한미군 감축안을 재고, 변경한 것도 한국의 가치가 50년 전보다 크게 상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철수' 라는 진자운동은 향후에도 여전히 상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50년간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미국이라는 버팀목을 통해 성장해 왔다.

한국외교를 '미국 중심' 이라고 부른 것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에 미국은 국가안보의 보증자였고 경제발전의 후원자였다.

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으로 제도화된 군사동맹 관계는 확실한 대북 (對北) 억지력으로서 효과를 발휘했다.

또 미국의 직.간접 군사원조는 한국의 방위력 증강, 군 현대화 등에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한국전에서 월남전까지 양국은 돈독한 혈맹관계를 유지했다.

냉전기 세계정치의 단면이 그같은 방식으로 양국관계에 투영됐던 것이다.

한국의 경제발전도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 속에서 가능했다.

50~71년 기간중 45억달러에 달하는 대한 (對韓) 경제원조는 한국의 전후 복구사업과 공업화를 위한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은 미국시장이 없었다면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난 50년간 한국사회의 가치 지향점도 미국적 패러다임을 배제하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요컨대 한국 현대사는 미국이라는 거울에 끊임없이 자신을 비추며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한.미관계 50년사는 '연미책' (聯美策) 이 성공을 거둔 시대였고 미국 또한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2차대전 이후 자유진영의 친미.약소국 가운데 한국만큼 정치.경제적으로 성공한 국가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괄목 성장은 미국 외교의 성공작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양국관계에는 협력과 갈등의 묘한 불협화음이 존재해 왔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반공포로 석방' , 70년대 '코리아게이트' '청와대 도청사건' , '광주' 이후 급속히 확산된 '반미감정' , 무차별적 '시장개방 압력' , 북한 다루기를 둘러싸고 벌어진 '한.미 공조체제 위기' 등은 양국간 긴장관계를 확인시켜 준 대표적 사건들이었다.

한국이 맹목적 친미성향에서 용미 (用美) 의 지혜, 즉 전략적 선택으로서의 연미책을 고려하게 된 것은 이런 갈등관계를 거치면서 점차 정치적 자율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 양국관계는 후견인 - 피후견인 관계에서 전략적 파트너로 성장했다.

대미외교가 전부였던 시대에서 외교적 다변화 전략을 모색할 수 있게 된 배경도 미국 중심의 신화가 서서히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미관계는 여전히 '사활적' (vital) 중요성을 갖는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한.미 동맹관계' 와 '북.미 제네바합의' 라는 두개의 축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후자는 개입전략의 성패를 좌우하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미국은 '4자회담' 이라는 기제 (機制) 를 통해 한반도 정세변화에 깊이 개입하고 있으며 중국.일본과의 관계를 각각 저울질하면서 한반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투사하고 있다.

한국은 앞으로도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미국 외교의 전개방향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양국관계의 지속성 속에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변화가 잠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기정 (연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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