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중도실용, 레토릭 넘어 콘텐트 갖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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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중도의 범위는 매우 넓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제시한 중도보수로부터 ‘제3의 길’을 표방한 중도진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노선들이 중도에 포괄된다. 제3의 길의 경우 영국 노동당은 ‘근본적 중도(radical middle)’를, 독일 사민당은 ‘신중도(Neue Mitte)’를 내걸어 1990년대 중·후반 정치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 제3의 길을 ‘신자유주의 좌파’라고 이름 지은 바 있다.

최근 중도의 가장 전형적 형태는 독일의 대연정일 것이다. 2005년 독일에서는 60년대에 이어 우파와 좌파 사이의 대연정이 다시 한번 이뤄졌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연립 정부는 시장에 활력을 부여해 경쟁력을 제고하는 동시에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실용주의 개혁을 추진해 왔다. 오는 9월 총선을 앞두고 기민·기사 연합과 사민당의 결별이 예상되지만, 대연정은 세계화 시대에 이념이 미치는 영향이 점차 감소돼 왔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사회 중도의 역사다. 해방 공간에서 좌우합작을 모색하는 중도 노선이 존재했지만, 정치 세력으로 확고히 뿌리를 내린 것은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부터다. 주목할 것은 이 과정에서 관찰할 수 있는 ‘한국적 중도’의 특수성이다. 분단 상황 아래서 진보가 정치적으로 불허됐기 때문에 상당한 진보적 인사들이 중도개혁을 표방해 왔다. 이념 구도에서 서구의 경우 ‘보수 대 진보’의 2분 구도가 일반적 경향인 것에 반해 우리의 경우 ‘보수 대 중도 대 진보’의 3분 구도가 자리를 잡아 온 역사·사회적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의 전형적 중도 정부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정부는 경제적으로 보수적 시장 주도 정책을, 사회적으로는 진보적 복지국가 정책을 추진해 왔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두 정부는 보수로부터는 좌파 정부, 진보로부터는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비판받아 왔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정치적 지향이 진보적이었다는 점에서 두 정부를 중도진보 정부로 이해하는 게 온당할 것이다.

전 지구적으로 적지 않은 정부들이 중도로 기울어지는 이유는 세계화의 충격과 그 결과에 있다. 세계화는 갈수록 국가 간, 기업 간 경쟁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그 사회적 결과로 양극화를 증대시킨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시장의 활력을 제고해야 하며, 양극화를 제어하기 위해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요컨대 중도 노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지난해 가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조정 국면을 고려할 때 중도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방향 수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최근 이명박 정부는 ‘중도실용’을 표방하고 친(親)서민 정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한편에선 포장만 중도라고 혹평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노무현 정부로의 회귀라고 비판한다. 물론 또 다른 시각에선 인수위 시절과 집권 초기에 내건 중도실용을 국정의 중심으로 다시 잡은 것을 반기는 의견도 적지 않다. 관찰자의 시선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가 감내해 온 고뇌를 이제야 내심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도실용에 대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역사에서 비약은 없다. 소극적 절충이 아니라 적극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선 앞선 정부의 경험을 지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생산적 함의를 주는 참고서로 활용해야 한다. 둘째, 중도를 제대로 성취하기 위해선 경제적 친서민 대책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 권위적 일방통치가 아니라 소통을 중시하는 민주적 거버넌스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중도 노선의 실제적 효과는 반감될 것이다.

국가 전략에서 노선의 천명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을 담보한 정책의 추진이다.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것은 ‘레토릭의 정치’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콘텐트의 정치’다. 부디 명실상부한 중도실용이 되길 바란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