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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8월 그리고 50년]사형선고·집행기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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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부수립 이후 97년까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1천명이 넘는다.

연평균 20여명에게 법정 최고형이 선고된 셈이다.

이중 사형이 집행된 것은 9백여명, 지금도 36명이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현대사는 정치적 격변이 많았던 만큼 사형선고나 집행이 시국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전쟁 직후인 54년에는 무려 68명이, '긴급조치시대' 였던 74년에는 58명이 각각 '처형' 됐다.

특히 5.16, 긴급조치, 12.12 등과 같은 정변 직후 사형이 급증했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경우도 많다.

81년 '내란음모죄' 의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 74년 '민청학련사건' 의 유인태 (柳寅泰).이철 (李哲) 전의원 등이 대표적인 경우. 사형수 중엔 정치적 희생양도 적지 않다.

육군공병감 최창식 (崔昌植) 대령은 6.25 당시 한강교 폭파를 지휘한 인물. 다리 폭파로 피난갈 수 없었던 국민의 분노가 치솟자 군 수뇌부는 그를 총살시켰다.

그러나 사후 14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승만의 정적으로 59년 진보당사건에 얽혀들어 사형당한 조봉암 (曺奉岩) 씨와 5.16후 사형된 조용수 (趙鏞壽) 민족일보사장 등도 비슷한 사례. 사형수 중에는 국가보안법.반공법 등 공안사범이 가장 많아 전체의 30%를 넘는다.

분단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 특히 74년 '인민혁명당재건위사건' 의 이수병 (李銖秉).도예종 (都禮鍾) 등 8명은 사형확정 하루만에 집행, 암울했던 시대상황을 가늠하게 한다.

내란목적 살인죄로 사형당한 사람은 74년 육영수 (陸英修) 여사를 살해한 문세광 (文世光) 한명뿐. 같은 죄목으로 96년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전두환 (全斗煥) 전대통령은 2심에서 무기로 감형, 사면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81년 '내란음모죄' 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특별사면된 경우. 대한항공 폭파사건의 김현희, 이번 8.15 특사로 나온 95년 '구미유학생사건' 의 김성만 (金聖萬) 등도 사형확정 뒤 특별사면된 이례적인 케이스. 현재 세계적인 추세는 사형제 폐지 쪽이지만 범죄증가 등을 이유로 오히려 부활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는 96년 11월 헌법재판소가 범죄예방 효과 등을 들어 "사형제는 위헌이 아니다" 는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정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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