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경찰은 잡고 검찰은 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경찰의 원천봉쇄와 한총련의 행사강행이라는 '8월의 가슴앓이' 가 올해도 되풀이됐다.

광복절을 전후한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행사를 둘러싼 갈등이 연례행사처럼 된 것이다.

한총련의 기세가 재작년 연세대 사건 이후 한풀 꺾였다지만 대학가 포위.중심가 지하도 검문검색 등 경찰이 대응하는 것을 보면 정부는 아직도 그 위험성을 많이 걱정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새 정부가 한총련 대학생들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시대가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다.

8.15특사에 한총련 관련 학생들을 대거 포함시킨 것이 그것이다.

한총련 사건 관련 기결수 1백27명중 53명이 준법서약을 하자 7명은 감형, 46명은 가석방.형집행정지로 전원에게 '은전' 을 베풀었다.

한총련이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라는 것은 대법원 판례다.

96년 이맘때의 연세대 사태 당시 3천여명의 학생들이 9일 동안 점거했던 이 대학 종합관의 방화로 그을린 모습은 참으로 충격적이었고 아직 복원이 제대로 안된 상태다.

또 검찰은 최근까지도 한총련 간부들에 대한 수배를 강화해 왔다.

무엇보다 경찰은 바로 이 시간에도 시위현장에서 2백여명을 연행, 구속 대상자 선별작업을 하고 있으니 이들의 특사 (特赦) 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더욱 관심거리는 91년 이후 96년까지 각각 전대협.한총련 대표로 북한을 방문했던 5명의 사법처리다.

검찰은 베를린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자진귀국하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열흘만인 17일 구속취소 결정을 내려 모두 석방했다.입북 소식이 전해질 때면 마치 이들은 무슨 대역죄인처럼 사진이 실렸고 그 가족들마저 고개를 숙이거나 울음을 터뜨리던 장면이 아직 생생한데 결국 언론만 푼수없이 호들갑을 떤 결과가 됐다.

국가보안법은 제1조에 '필요한 최소한도만 해석적용해 인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명시한 다소 색다른 법이다.

즉 법 자체가 바로 기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때문에 국내외의 인권.사회운동 단체가 줄기차게 폐지를 요구하고 있는 문제의 법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검찰이 피의자를 열흘만에 스스로 풀어준 것은 국가보안법의 남용이란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아니면 가뜩이나 손가락질받고 있는 법을 너무 느슨하게 적용했다거나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운용한다는 지적도 받을 수 있다.

서약서 한장으로 열흘만에 구속취소 결정을 내려야 할 정도의 범죄사실이었다면 처음부터 구속하지 말았어야 옳았다.

현실적으로 사면.복권은 바로 면죄부와 다를 게 없으므로 현 정부처럼 준법서약서를 낸 시국.공안사범을 모두 사면.복권한다면 '준법서약서 = 사면.복권 = 면죄부' 인 셈이다.

그렇다면 면죄부의 결정권을 교도소에 갇혀 있는 당사자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준법서약서를 내고 석방된 지 이틀만에 25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준법서약 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것을 정부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 최근 검찰이나 법무부 관계자가 시국.공안사범에게 면죄부를 주지 못해 안달인 듯한 느낌을 준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오늘도 전경대원들은 한총련 대학생을 붙잡기 위해 대학가에서, 닭장차 안에서 밤을 지샌다.

그렇지만 검찰은 준법서약서를 내면 풀어준다고 지금도 설득에 나서고 있다.

한 손으로 잡아들이고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놔주는 형국이다.

이는 형사정책적 차원에서도 안될 일이다.

"과거 잘못은 불문이고 (검찰) , 지금부터는 안된다 (경찰)" 라는 이중적 잣대의 법 운용은 금물이며 난센스다.

적용기준과 형평성이 무너진 법은 존엄성을 잃음과 동시에 국민에게 혼란만 주게 되기 때문이다.

새 정부는 국가보안법과 한총련에 대한 입장부터 분명히 정리해야 한다.

새 정부에는 과거 국가보안법 폐지론자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문제 부분을 고치거나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다면 폐지까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제6기 한총련의 이적성이나 성격도 다시 따져보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집시법 (集示法) 정도를 내세워 온 대학가와 시내 중심가를 에워싸는 과잉방어는 없애야 한다.

반면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본다면 한쪽에서 잡아들이고 동시에 다른쪽에서 풀어주는 일은 재고해야 한다.

권일(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