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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속 인질의 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新인질의 사회' (본 칼럼 7월14일자 6면 보도) 를 읽고 나서 많은 분들이 전화를 주셨다.

이런저런 이유로 보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어 냉가슴을 앓고 있는 분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보증으로 인한 피해가 단순히 재산상의 손실에 그치지 않고 친족관계의 파탄으로까지 비화된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정부 산하기관에서 중견관리자로 일한다고 밝힌 한 독자는 "정부에서 보증금지법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느냐" 며 절박한 심정을 호소했다.

이 독자가 털어놓은 사정은 이랬다.

친형의 아들이 얼마 전 금융업체에 입사하게 됐다.

그 회사에서는 재정보증인을 요구했다.

친형은 준공무원 신분인 동생에게 아들의 보증을 서줄 것을 요구했다.

"아무리 친조카라고 해도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재정보증은 서기 어렵다" 며 완곡하게 거절한 동생의 말에 격분한 형은 직장까지 찾아와 "너 같은 놈은 직장을 못 다니게 하겠다" 며 협박에 가까운 행패를 부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자신의 딱한 처지를 알고 있는 친구가 칼럼을 팩시밀리로 전송해줘 읽게 됐다는 이 독자는 "유난히 한 핏줄을 따지는 우리 생활에서 친족의 보증기피는 곧 원수지간이 된다" 며 관계기관들이 하루빨리 보증인의 덫에서 모두가 놓여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줄 것을 간구했다.

제도의 모순을 비난한 독자도 있었다.

자수성가한 자영업자라고 밝힌 이 독자는 "차라리 형편이 닿으면 그냥 도와주지, 누구에게도 보증을 서주지 않는 게 생활신조" 라고 말했다.

그 편이 남도 편하고 자신도 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은 탓에 재산상의 손실을 감수해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제가 내는 재산세 (건물분) 만 해도 70만원이 넘습니다.

거래은행에서도 '우수고객' 으로 선정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 자동차 한 대를 할부로 사려고 해도 보증인을 세우라고 합니다.

내 자신이 보증을 절대로 안 서기로 했는데 누구한테 보증을 서달라고 합니까.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 로 늘 한몫에 돈을 다 내고 사거나 아니면 포기하거나 할 수밖에 없어요. 제아무리 세금을 많이 내고, 재산이 있고, 은행의 우수고객이라고 해봤자 다 소용없어요. "

이 독자도 일가친척에게 보증 서는 것을 단호히 거절한 탓에 거의 모든 친척들과 냉랭한 관계가 돼 있었다.

전화를 주신 많은 독자들은 우리도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처럼 언제나 개인의 신용관리가 철저하게 자신의 몫으로 돌려질 수 있을까를 반문하며 한숨 쉬었다.

사회는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다.

우리네 가정문화도 그 변화의 격랑에 휩쓸려간다.

자본주의의 '신 (新) 연좌제' 사슬을 끊어내야 할 필요성은 가족관계를 둘러싼 우리들의 의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데도 있다.

'한 핏줄이니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아야 한다' 는 가정문화가 아직 주류이긴 하지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사촌도 남' 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보증 때문에 '남보다 못한 일가친척' 으로 전락해버린 이들이 겪는 심적 고초란 말할 수 없이 크다.

한 독자는 "국제통화기금 (IMF) 시대 이전만 해도 보증 서달라는 부탁이 들어오면 내키지는 않았어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며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안전한 직장이 어디 있으며, 설사 직장은 안전하다고 해도 누가 그 사람의 자리를 보장할 수 있겠느냐" 고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금융기관이 걸핏하면 보증인을 '인질' 로 삼고 살아갈 만큼 한가한 시대는 아니다.

정부가 수립된 지 50년이 지났다.

국민의 정부는 제2의 건국을 부르짖고 있다.

제2의 건국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우리의 생활문화에서 '자신의 신용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 도 한 주춧돌이 될 수 있다.

금융전산망과 행정전산망의 가동은 그런 면에서 희망적이다.

개인신용 측정을 위한 자료축적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일본처럼 금융기관이 자회사의 형식으로 개인신용평가기관을 설립하든지 아니면 미국식으로 이를 전담하는 회사를 따로 세워 개인신용관리 기준을 만들어나가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홍은희(생활과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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