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부부의 '아름다운 천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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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4일 오전 11시 경기도파주시 재해대책본부. 주부 10여명이 막 도착한 매일유업 트럭에서 내려진 분유통을 한두개씩 받아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평생 이렇게 반가운 선물은 없었어요. 물난리통에 분유 사러갈 틈도 없고…. 할 수 없이 밥을 먹였더니 애가 밤새 설사를 하는 거예요.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 " 趙애리 (29.파주시금촌2동) 씨는 10개월 된 딸아이가 분유통을 안고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비치기까지 했다.

이날 주부들을 감동시킨 '특별 구호품' 은 중앙정부나 자치단체가 보낸 것도 아니고 매일유업의 호의도 아니었다. 한 30대 서민부부가 10년동안 간직해 온 정성이 밴 것이었다.

88년 봄 결혼한 이 부부는 신혼여행조차 변변히 다녀오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아 결혼 10주년때 해외여행을 가기로 한 뒤 매달 7만원씩 적금을 부어왔다.

회사원인 남편의 월급으론 결코 적지않은 액수였고 집 장만이 급해 아파트 중도금으로 쓰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올해 초 1천만원을 모으게 됐다.

하지만 집중호우가 이들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수해지역 어린이들이 분유와 기저귀가 없어 고통받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뒤 이들을 돕기로 한 것. 이들은 수재의연금을 기탁하는 대신 직접 물품을 전달하기로 하고 매일유업에 전화를 걸어 분유 6백만원어치 5백30통을 구입하고 나머지 4백만원으로 기저귀를 샀다.

그리고는 매일유업에 부탁해 14일 경기도파주와 의정부.서울노원구 등 수해지역에 분유를 전달했다. 15일엔 남편이 친구의 트럭을 빌려 직접 기저귀 2천개를 파주군조리면.광탄면 등 오지마을을 돌며 나눠줬다.

이들의 선물이 전달된 뒤 지역 재해대책본부와 동사무소 등에는 "분유도 나이 단계별로 준비하고 기저귀도 남녀용을 구분하는 등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다.

전화로 인사라도 해야겠다. 도대체 그분들이 누구냐" 는 문의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이웃을 위해 좋은 일 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며 기자에게조차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박신홍.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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