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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100대사건]연대별 키워드 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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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50년대]군화와 양키문화

'전선야곡' 이 애절하게 귀청을 울리고 있지만 이미 코끝에는 전혀 다른 새 시대를 예고하는 유혹의 바람이 스치기 시작한 때가 50년대다.

3년 한 달동안 계속된 전쟁의 포연이 걷히자 그 자리에는 폐허와 기아만 남았다.

1천만명에 가까운 전쟁 피난민들이 옮겨다니는 사이 어느 틈엔가 전쟁의 사생아처럼 도시 변두리문화가 자리잡았다.

미군을 따라 들어온 양키문화도 그 주역의 하나. PX 초콜렛과 추잉껌 그리고 물들인 군복.군화가 시대의 상징이었다.

전쟁은 오랫동안 닫혀있던 세계로 향한 창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그 창을 통해서 욕망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자유 연애나 풍요를 바라는 욕망은 차츰 사회적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윤철규 기자

[60년대]혁명과 재건

요셉 보이스의 작품명 그대로 '우리는 혁명' 이었다.

4.19와 5.16.이어 국민의 '살아가는 혁명' 이 시작됐다.

목표는 오로지 재건이었다.

이른 아침 재건체조로 몸을 풀고선 재건복을 입고 일터로 나갔다.

'잘 살아보세' '올해는 일하는 해' 라는 노래에 몸과 마음을 맞추고서…. 그것은 새나라자동차의 등장 (62년) 과 전차의 퇴장 (68년) 으로 상징될 만했다.

영화가 문화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시아영화제는 온통 한국의 축제여서 신상옥.신영균.김지미.박노식.최은희 같은 영화인이 상을 휩쓸었다.

프로복서 김기수선수의 세계타이틀 획득 (66년) .그리고 정경화의 국제음악경연대회 바이얼린부 1위 (67년) . '한강의 기적' 이 눈뜨고 있었고 그만큼 부정의 싹도 자라고 있었다.

허의도 기자

[70년대]유신과 청·통·생

시대의 좌절은 차츰 깊어갔다.

정녕 당대 청년문화는 저항이어야 했는데도 한쪽에서 다른 양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바 '청.통.생' .청바지.통기타.생맥주에 익숙하지 않으면 간첩이라는 말에서 풍기듯 그건 이념의 절망에서 비롯된 산물이었다.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바보들의 행진' 으로 상징되는 소설.영화도 청.통.생 또는 좌절의 한 단면 같은 것이었다.

포크계열의 대중음악과 록, 그리고 남진.나훈아풍 트로트의 공존. 미약하나마 언더그라운드에선 김민기.한대수 같은 저항음악인을 키웠다.

하지만 청.통.생은 우리 문화를 미국화하는 첨병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시절은 김재규의 '이런 버러지 같은…' 이란 외침과 함께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허의도 기자

[80년대]민중

'5.18광주민주화항쟁' 을 '원죄' 처럼 짊어진 대학생들은 이영희씨의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 독일대학생들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그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등을 필독서처럼 끼고 다녔다.

지하서클이든 공개모임이든 '종속이론' '제3세계론' 이 유행이었다.

교복 자율화.야간통행금지 해제.컬러TV의 도입등 외형적인 자유나 화려함과는 달리 정신적.이념적으로는 점점 경색되어 갔다.

민중문학.민중극.민중가요.독립영화.민중판화…. 그러나 이 금욕적인 사회분위기는 동구권의 몰락과 서울 올림픽 이후의 물질적 풍요로움이 동반한 '개인주의' 와 '다양성' 에 의해 언제 그랬냐쉽게 단박에 밀려났다.

이영기 기자

[90년대]카오스

90년대 문화지형도는 카오스 그 자체다.

80년대식 규범과 이념이 사라진 공백에 우후죽순의 목소리가 경합하고 있다.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기다리면서. 사상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이 분위기를 이끌었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신뢰했던 모더니즘에 대한 반격. 80년대 사회를 가로질렀던 공동체적 가치관이 무너지고 대신 개인의 특성.자유가 강조되었다.

'중심' 이 실종된 속에서 문화주체들의 각개약진이 불을 뿜었다.

사소한 일상경험을 털어놓는 신세대 소설가들, 랩과 영상문화에 열광하는 청소년들, 소수의 매니어를 겨냥한 전문서적 등. 광주비엔날레와 부산국제영화제 등 지역문화의 활성화도 눈에 띈다.

활자의 시대는 퇴장하는 것인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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