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독립운동가 이준형 피묻은 유서 공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石洲) 이상용 (李相龍.1858 - 1932) 의 아들이자 독립투사로 90년 애국장을 받은 이준형 (李濬衡.1875 - 1942) 이 일제에 항거해 자결하면서 뜨거운 핏자국을 남긴 애끓는 유서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13일 공개됐다.

이준형은 42년 9월2일 67세 생일에 동남아가 일본에 함락됐다는 일본신문을 보고 동맥을 끊었다.

이 유서는 안승준 정문연 전문연구위원이 최근 경북 안동시 법흥동 소재 이준형의 고가 임청각 (臨淸閣.1515년 건립.보물 182호)에 끈으로 묶어 방치된 이준형의 유고 가운데서 찾아냈다.

"내 아들 대용 보거라 (兒子大用見之)" 로 시작되는 유서 (33.2×33.5cm의 한지) 는 "하루를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를 더하는 것" 이라며 "나의 처사를 군자가 듣게 되면 혹 경망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내 나름대로 택한 도리가 있으니 너는 모름지기 내 마음을 헤아려 과히 슬퍼하지 말라" 고 담담하게 적고 있다.

그가 택한 '도리' 란 의병장 유인석이 말한 독립운동 방법으로 총을 들고 싸우는 것, 망명, 자결 중 자결을 의미한다.

이준형의 집안은 부친 이상용을 비롯 한 가계에서 독립장 4명, 애국장 1명, 애족장 4명, 모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상룡은 1911년 아들 이준형을 비롯한 친척과 친지 50여 가구를 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준형은 부친이 25년 임정의 초대 국무령으로 활동하다 32년 "국토를 찾기 전에 내 몸을 고국에 묻지 말라" 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한데 이어 일본이 만주국까지 세워 탄압해오자 노모를 모시고 안동으로 돌아왔다.

국내에서 일경의 특별감시를 받던 그는 일본의 동남아 함락 소식을 접하고 마지막으로 자결을 항거의 수단으로 쓴 것이다.

그의 며느리는 독립운동가 허위의 손녀인 허은 여사로, 허여사는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란 책에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겪은 혹독한 어려움과 시아버지 준형의 자결을 알린 바 있다.

이준형 가문은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풍비박산이 난 상태. 이상용이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팔았다가 친척들이 모금해 다시 사들인 임청각은 현재 관리마저 소홀한 상황이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