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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영, 11좌에서 멈춘 14좌 도전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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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산과 결혼한 여자’는 끝내 산의 품에 안겼다.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는 여성 산악인 고미영(41·코오롱스포츠·사진)씨의 산사랑의 절정이자 마지막 봉우리였다.

고씨는 10일 오후 8시30분(이하 한국시간) 낭가파르바트(8126m) 정상을 밟은 뒤 하산하다 11일 오후 10시30분쯤 실종됐다. 고씨는 헬기 수색 끝에 12일 오후 3시10분쯤 추락 지점에서 1.5㎞ 정도 아래 협곡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고씨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한국의 두 여걸이 펼쳐온 ‘아름다운 경쟁’도 막을 내렸다. 최근 세계 산악계의 화두는 고씨와 오은선(43·블랙야크)씨가 벌인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14좌 여성 최초 완등’을 향한 경쟁이었다. 지금까지 14봉 완등을 이뤄낸 여성 산악인이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각각 10개가 넘는 고봉을 발 아래 둘 만큼 엄청난 속도전을 펼쳐 왔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오후 4시47분 오씨가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오른 데 이어 고씨가 4시간도 지나지 않은 오후 8시30분 정상을 밟았다. 오씨는 12개째, 고씨는 11개째 8000m급 완등이었다. 두 여성이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놓고 벌인 경쟁을 산악계에서는 ‘아름다운 도전’이라 불렀다.

둘 사이 경쟁에 불을 붙인 주인공은 고씨다. 공무원이던 그는 1991년 코오롱등산학교를 통해 산과 인연을 맺었다. 출발은 스포츠클라이밍이었다. 국내외 대회를 휩쓰는 한편 국제대회에서 5위에 오르는 등 세계적 스포츠클라이머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고산 등반가로 변신한 것은 2005년 파키스탄의 드리피카(6447m) 원정에 참가하면서부터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 최고의 여성 산악인이었던 오은선씨에게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씨는 1997년 가셰르브룸(8035m), 2004년 에베레스트(8848m)를 오르며 14좌 완등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뒤늦게 고산 등반의 매력에 빠진 고씨는 2006년 초오유(8201m)에 이어 2007년 5월부터 10월까지 에베레스트(8848m)·브로드피크(8047m)·시샤팡마(8012m)를 차례로 오르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고씨의 발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8년에는 로체(8516m)·

K2(8611m)·마나슬루(8156m)를 올라 오씨의 턱밑까지 추격했다. ‘히말라야의 불도저’란 별명을 얻은 엄홍길의 젊은 날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올해 마칼루(8463m)·칸첸중가(8586m)·다울라기리(8167m)를 발 아래 두며 10개 봉을 돌파했다.

고씨는 10일 낭가파르바트에 오른 뒤 소속사를 통해 “남은 3개 봉도 안전하게 등정해 대한민국 여성의 기상을 전 세계에 떨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열한 번째 완등에 성공한 낭가파르바트를 마지막으로 미혼 산악인의 ‘아름다운 도전’은 끝을 맺었다.

박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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