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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이전에 가족이 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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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호 16면

두 주 전 열린 US오픈.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띄었다. 데이비드 듀발(38). 짙은 선글라스가 트레이드 마크인 사나이다.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과묵한 골퍼이기도 하다. 더 이상 그의 모습을 필드에서 보지 못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의 귀환이 더욱 반가웠다.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67>

듀발은 미국의 영웅이었다. 특히 백인의 우상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항상 ‘고독’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9세 때 형을 잃었다. 병명은 재생불량성 빈혈. 그의 부모는 큰아들을 살리기 위해 듀발의 골수를 떼 이식 수술을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부모는 곧 이혼했다. 듀발은 형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런 그에게 골프는 위안이자 피난처였다.

1999년 세계랭킹 1위에 올랐지만 영화(榮華)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1년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한 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는 허탈감이 그를 엄습한 모양이다. 극심한 슬럼프가 찾아들었다. 2003년엔 어지럼증(vertigo) 진단까지 받았다. 귓속 기관 장애로 머리를 돌릴 때마다 구토를 동반한 현기증을 느껴 운전도 포기할 정도였다. 그러던 2004년, 듀발은 가정을 꾸렸다. 그는 아이가 셋 딸린 여성과 결혼했다.

듀발은 지역예선을 거쳐 올해 US오픈에 출전했다. 그러고는 공동 2위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세계랭킹 882위로 전락했던 그가 강자들과 우승 경쟁을 펼칠 수 있었던 건 ‘가족’의 힘이었다. 두 살배기 아들을 안고 그는 말했다.

“내가 골프를 잘하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대런 클라크(41). 라운드 도중 시가를 피워 물곤 하던 이 애연가는 2004년 술과 담배를 끊었다. 아내 헤더가 유방암 진단을 받은 뒤의 일이다. 헤더가 2006년 세상을 떠나자 동료 선수들은 검은 리본을 달고 애도했다. 친구 폴 맥긴리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메이저 대회인 PGA챔피언십을 포기했다.

2006년 라이더컵. 대회는 6주 전 아내를 잃은 슬픔을 딛고 유럽을 위해 출전한 클라크를 위한 대회 같았다. 유럽은 클라크의 분전 속에 미국팀을 역대 최다 점수 차로 꺾고 우승했다. 승부가 결정된 뒤 클라크가 팬들의 기립박수 속에 울먹이던 모습은 라이더컵 역사에 길이 빛날 명장면이었다.

최근엔 세계랭킹 2위 필 미켈슨(39)에게 불행이 닥쳤다. 애처가로 이름난 미켈슨은 16일 개막하는 브리티시 오픈에 출전하지 않는다. 지난 2일 유방암 수술 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아내 에이미를 돌보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 5월 모자에 핑크 리본을 달고 크라운 플라자 인비테이셔널 대회에 나갔다. 핑크색은 유방암 예방과 치료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루크 도널드, 비제이 싱 등 동료 선수들은 아예 핑크색 옷을 입고 출전했다.

악전고투하는 미켈슨에게 최근 또 하나의 나쁜 소식이 더해졌다. 어머니 메리마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골프 팬들은 한동안 미켈슨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 곁에서 아내와 함께 병마와 싸우는 그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미켈슨이 간직한 가족에 대한 사랑과, 가족이라는 이름의 거역할 수 없는 가치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국은 가족이다. 골퍼들은, 아니 우리는 가족이 있기에 어떤 시련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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