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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히 무장한 ‘사회의 갑옷’에서 틈새를 찾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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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울 대치동의 금호 복합문화공간 ‘크링’. 문화 에너지의 공명을 상징하는 이 건물은 커다란 덩어리에서부터 건물 내부의 사소한 디테일까지 동그라미의 건축적 가능성을 모색한 작품으로 꼽힌다. 사진은 이탈리아 건축사진가 세르지오 피로네가 찍었다. [‘운생동’ 제공]

“크링(Kring)에 다녀왔어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이색적인 공간을 찾아다니는 블로거들이 요즘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리며 자랑하는 얘기다.

그들이 찍은 ‘크링’ 사진을 들여다보자. 이들이 남긴 다양한 감탄사 만큼이나 그들이 ‘크링’에서 느꼈을 설렘과 감동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어마어마한 사운드를 뿜어낼듯한 대형 스피커 모양의 외벽, SF영화 속 세트처럼 보이는 흰색 실내구조, 공간과 공간을 잇는 원통형 브릿지. 이 건물에는 평범한 게 별로 없어보인다.

이 파격적이고 과감한 디자인 뒤에 건축가그룹 ‘운생동(韻生同)’의 장윤규(45·국민대 건축대 교수)·신창훈(39) 소장이 있다. 건축을 통한 ‘인문학적 상상력의 실현’을 추구해온 이들은 “순수 국내파 출신으로 탄탄한 국제 경쟁력을 입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각서쓰라고 했다”=‘크링’은 1년 전 서울 대치동 휘문고 사거리 인근에 세워진 금호그룹의 복합문화공간이다.

“현상 설계에서 뽑혔는데 막상 건축주(금호건설)를 설득하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정말 지을 수 있느냐고 걱정하더군요. ‘실현이 가능하다고 각서를 쓰라’고 했을 정도였죠(웃음). 다행히 실무진이 적극 밀어줘서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크링’은 네덜란드어로 ‘원’이란 뜻이다. 이들은 ‘울림’이란 모티브에서 출발, 도시의 에너지를 빨아들이기도 하고 발산하는 커다란 울림통을 생각했단다.

◆건축과 조각 사이=“성냥갑처럼 생긴 건물은 짓고 싶지 않았죠. 사람들이 쉬는 장소인 동시에 그 자체가 도시라는 공간의 조각물이 되는 건물로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이들은 건축이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했다. 벽이란 무엇인가, 공간이란 무엇인가, 재료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으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과정이 건축을 새로 정의하는 것이라 믿는단다.

서울 신사동의 예화랑(2006)은 이같은 ‘묻고 답하기’ 과정이 집중적으로 드러난 작품이기도 하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주와 1년 간 대화했다”고 말하는 그들은 “우리가 가장 많이 성숙할 수 있었던 프로젝트였다”고 말했다. 이것을 설계하기 전에 던진 질문은 건물의 ‘스킨(외벽)’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단다. 외벽이 단순한 껍데기의 속성을 지닌 벽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전면에서는 창이 보이지 않지만 살짝 비틀어보면 창의 속성이 보입니다.” 벽인지 담인지 모를 벽사이로 생긴 공간은 창이면서 동시에 발코니같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라며 “진정성이란 같이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진정성이 국제 무대에서도 통한 것일까. 예화랑 건물은 이들에게 세계적인 건축상인 AR어워드를 안겨줬고, 외국 건축저널 15군데 이상에서 소개될 정도로 크게 주목받았다.

◆문화의 틈새 만들기=이들이 던지는 ‘공간’에 대한 질문은 다른 건축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있다. 복도를 8m 폭으로 만들어 ‘복도’라는 공간에 대한 통념(평균 2.4m)을 깬 서울대 건축대 건물, 실내에 앉아서 쉴 수 있는 계단을 만든 생능출판사 사옥도 그런 예다.

이런 실험엔 ‘복합체’이론을 만들고 갤러리 정미소를 운영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최근 사단법인 ‘스페이스코디네이터’를 발족시킨 장 소장의 의지도 한몫한다. “건축은 혼자서 건축이 되지 않아요. 건축과 미술, 다른 문화 영역은 서로 ‘소통’하면서 다양한 건축 언어를 만들어내죠. 사회가 갑옷으로 단단하게 무장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 갑옷 사이로 틈새를 발견하고 이 공간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장 소장은 가구 디자인·설치미술(2009 하이서울 페스티벌 디자인 감독)을 넘나들며 ‘갑옷의 틈새’를 찾기 위해 계속 질문을 던지겠다고 했다. 아주 새롭게, 그리고 과감하게.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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