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 서서…소설가 김주영씨 등정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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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의 북한문화유산조사단과 함께 지난 7일 북한에 들어간 소설가 김주영 (金周榮) 씨가 북한쪽 루트를 이용한 최초의 백두산 탐사를 마치고 현장에서 쓴 등정기를 20일 본지에 보내왔다.

북한 현지에서 전해온 방북조사단의 글로는 고은 (高銀) 시인의 시 '금강산' 에 이어 두번째다.

백두산보다 더 높은 산은 백두산 뿐이다.

그러나 백두산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은 천지다.

백두산 만나기 이미 다섯 차례, 이제서야 장군봉 (병사봉.2, 750m)에 올라 구름과 같이 달리는 천지를 본다.

고여 있지만 흐리지 않고, 멈추어 있지만 언제나 구름과 함께 달리며, 진화하지 않지만 하루에도 백번 얼굴을 씻고, 천만년을 살았지만 늙지 않는 것은 하늘의 붓이 그 물자락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바람조차 미치지 못하여 구름만이 그 비취빛 물자락을 다스린다.

번뇌와 고통, 다툼과 질시를 천만년 세월의 바람 속으로 흘려보내고, 오직 고요와 평정만이 물자락에 가득하다.

남의 나라가 아닌 우리 민족의 땅으로부터 엎어지고 싶게 발을 달려온 천지의 오묘함이 차마 가슴 벅차 형언키 어렵다.

교태스럽지 않아 믿음이 있고, 정교하지 않아 오히려 비장하다.

그 담백한 신뢰는 종교의 인격을 뛰어넘어도 천지는 언제나 가만히 앉아 있다.

그 천연스러움이 작고 작은 나에게 부끄러움을 만들게 한다.

그러나 천지를 다스리는 것은 구름 뿐만이 아니다.

장군봉 윗자락 끝까지, 그리고 천지로 가는 아랫자락까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아리랑 땅꽃이다.

7월 하순의 잔혹스런 비바람 속에 화산석을 뚫고 오른 땅꽃은 차라리 태양이 가까워 꽃잎부터 피우고자 한다.

타인의 운명으로 피지 않고 바람과 우박과 서리를 이겨냄이 그토록 당당하여 한 송이도 무릎 꿇지 않았으니 그것은 꽃이 아니고 보석이다.

바라보는 이 아예 없어도 보석의 정교함과 교태를 저들만 가졌기에 천지에 나눌 것이 없었던가 보다.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백두산의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새벽보다 빨리 일어서는 나무들은 장군봉과 천지에 열려 있는 하늘을 향해 벌떡 일어서기에 거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깔나무.백양나무.가문비나무.분비나무.벚나무 할 것 없이 초라함이 없으니 두렵다.

장엄한 이 백두의 산자락이 남으로 남으로 줄기차게 뻗어내려도 기상과 기백이 살아남아 백무고원을 지나고 그 패기가 죽지 않는다.

그 기슭에 감자와 보리와 나락을 심어 가마솥에 끓여 먹었던 우리 민족 반만년 무릎 꿇지 않고 살아오게 하였다.

왕벌 우는 소리를 내며 뻗어가다 지루하면 금강산.태백산.설악산을 두고 마지막 한자리 한라산을 두었으니 백두의 자상함이 그래서 차라리 비장하지 않은가. 끝 모르게 뻗어간 숭산준령이 너무나 아득한 백두산, 우리 강토가 마련된 근본이며 천상과 천하를 이어주는 신성한 산, 그래서 내 작은 이름을 그 아래에다 적는다.

백두산 삼지연 밑 베개봉호텔에서 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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